5학년 3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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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 5학년 3반 담임
  • 학생수 : 남 11명 / 여 14명

백종원

이름 백종원 등록일 23.11.09 조회수 25

1966년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자라다가 중학교 시절 상경해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엔 잠시 서울특별시 장한평에 위치한 중고차 시장에서 자동차 중개업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9년 KBS의 토크쇼 프로그램인 대화의 희열에 출연하여 어렸을 적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만석꾼이었던 증조할아버지 백영기의 피를 이어받은 영향인지 어렸을 때부터 장사꾼 기질이 있다고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9살 때에는 산에 놀러갔다가 본 버섯 농장에서 돈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꿈을 버섯 농사로 정한 적도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때는 캔이 아닌 병에 음료가 나올 시절에 음료수 병을 보고 학교 리어카를 빌려 오락 시간과 보물찾기 같은 시간을 다 건너뛰고 리어카 6개 분량의 공병을 모아서 고물상에 갖다 팔아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리고 5학년 1학기까지 이렇게 돈을 벌었고, 방위성금으로 다 냈다고 한다. 5학년 2학기부터는 공병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서 할 수가 없었다고.

 

대학입시가 끝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친구의 형이 중고차 장사를 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호객행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라고 한다.

 그런데 이 호객행위가 너무 단순했으며, 막상 이렇게 손님을 불러와도 안에서 딜러들이 설명을 너무 못하고, 손님이 어떤 차를 원하는지 바로 알아채지 못해서 본인이 직접 알려줘도 딴소리를 하면서 손님을 놓치는게 답답한 나머지 직접 딜러를 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딜러로 일하기 시작한지 40분 만에 차를 파는 데 성공하고 며칠 만에 차를 6대나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2번째로 차를 사간 손님이 미터기 조작과 사고 경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모르고 팔았던 백종원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고 한다.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자동차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거기까지는 의욕이 없어서 더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요식업에 뛰어든 것은 대학생 때로, 연세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 삼아 일한 압구정동 호프집을 1달 만에 인수하면서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는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서 였다고 한다.

 

이때 상권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주변에 치킨 가게가 없으니 배달이나 포장 판매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주인 할머니에게 권유를 했지만 할머니는 썩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고, 이를 설득해서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면서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은 끝에 핸드메이드 전단지를 만든다.

 그런데 전단지를 돌리고 싶었는데, 당시 아파트의 경비가 삼엄해서 경비에게 치킨을 돌리면서 전단지를 돌릴 수 있게 허락을 받아 아파트에 전단지를 돌렸고 돌아오자마자 전화가 많이 와서 이때 장사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정작 이때는 이렇게 반응이 빠를 줄 몰라서 준비가 아직 안 된 상황이라 곧바로 배달을 시작하지는 못했다고.

 

그러다 얼마 안 가서 일이 너무 많아지니 치킨 튀기는 기계도 5대까지 늘렸지만 할머니가 병을 얻고 가게가 잘되니 힘들다는 이유로 가게를 내놓기로 결정했고, 이걸 아쉽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가게를 직접 하지 않겠냐"고 할머니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근데 통장에 돈이 그렇게 많이 없어서 "돈이 어딨어서 가게를 인수하냐"니까 할머니가 "지금 가진 것 만이라도 가져오면 내주겠다, 너는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가게를 백종원에게 넘긴다.

그렇게 잔금을 모두 갚으면서 가게를 완전히 인수하고, 이후 3년간 가게 3개를 운영하며 15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으나, 백종원이 나이트 클럽을 인수하려던 것을 알게 된 가족이 기겁을 하고 결사반대 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육군 학사장교로 지원하게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첫 면회 때 "그간 행적을 모두 알고 있으니 허튼 생각 말고 군 복무나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고. 결국 나이트 클럽은 인수하지 못했고, 입대 후 가지고 있던 호프집은 염가에 처분했다고 한다.

 

1989년 가족에게 쫓기듯 육군 학사 14기로 들어가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난 이후에 육군 제7포병여단에서 포병장교로 복무했지만 중간에 급양과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직책을 만드는 업적을 달성했다.

 SBS 힐링캠프 78회에서 말하길, 백종원은 포병여단 본부대 부관이었는데 훈련보다는 간부식당에 더 관심이 많았었고, 간부식당을 관리하던 본부대 선임하사는 조리보다는 훈련을 맡고 싶어해서 보직을 서로 맞교환 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선임하사의 입장에서는 훈련을 꼭 맡아야 했는데,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부사관의 한직 TOP이 급양 관련 보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백종원은 군대에서 진급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직으로 가도 상관이 없었고, 마침 조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조리 관련 보직을 맡고 싶어했는데 기존 선임하사는 훈련을 맡고 싶어했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흔쾌히 바꿔 준 것이라고 한다.

 

장교가 자기 임무는 팽개치고 조리실이나 기웃거린다고 여단 참모한테 불려가서 쪼인트를 까이기도 했지만, 식당을 기습 시찰한 여단장이 밥을 맛보고는 백 중위의 보직을 정식으로 인정하면서 본의아니게 여단본부 급양사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참모 장교들의 대우가 180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명색이 장교인 데다 음식 맛을 본 별들의 선택에 의해 간부식당 관리장교가 된 만큼 사회로 치면 수석 요리사인 셰프 역할을 하면서 휘하 병력들에게 보조적인 지시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백종원은 장교 출신자 중에서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 전무후무, 그리고 유일무이한 보직인 '급양과장'으로 보임되어 근무한 경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장교나 부사관이 보임될 수 있는 보직인 인사나 군수와 달리 급양관리는 부사관, 그것도 아주 일부를 제외한 보통 초임 중하사가 군수과 밑에서 맡기 때문에 절대로 장교가 임명되는 '과장' 보직이 될 수 없다.

근데 장교가 급양관리를 했으니 급양과장 보직인 셈.

 

당시 여단 본부대 취사병들은 사회에서 요리를 하다 온 사람들이고, 군기는 군기대로 완전히 빠진 상태라 간부들이 밥맛에 대해 지적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보름 동안 가만히 지켜보겠다고 선언한 다음에 아무도 모르게 무, 칼, 도마를 간부식당으로 가지고 가서 칼로 무를 써는 연습을 매일 4~5시간씩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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