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2반

남을 배려하며 더불어 함께할 줄 아는 어린이

자신을 사랑하며 존중하는 어린이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어린이

  • 선생님 : 최진혁
  • 학생수 : 남 15명 / 여 14명

6모둠

이름 김주완 등록일 19.05.23 조회수 15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광복되었지만 남·북한을 미·소 양군이 점령함으로써 통일정부의 수립이 요원하게 되자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협정에서 '한국에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한다'라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곧 서울에서 열린다는 외신보도가 있었고 즉시 독립정부의 수립을 갈망해온 전국민은 이에 분노했다. 따라서 그해 12월 30일에 반탁전국대회()를 열고 100여 개의 애국사회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2월 31일에 권동진()을 위원장, 안재홍(김준연()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고 반탁시위대회를 전개하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고, 공산주의자들도 반탁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찬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2일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단체 연명의 모스크바 결정 지지 공동성명서, 3일에는 북조선행정국장회의 성명서 등이 잇달았는데, 이 성명서들은 한결같이 임시정부수립의 의의를 강조하고 신탁통치는 ‘후견제()’라고 역설하였다. 박헌영()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1946년 1월 4일 좌익진영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섰으며, 신탁통치문제는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탁운동은 금지되고 조만식은 연금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은 그들의 점령지역 안의 모든 반탁세력을 거세하여 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모스크바 협정 지지로 통일시키고 남한의 좌익진영도 찬탁하게 하여 미 ·소 공동위원회()에 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좌익계열의 찬탁을 분쇄하기 위해 민족진영단체들이 단결하여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 시위 ·집회 ·언론 등을 통해 미 ·소 공동위원회에 항의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격렬한 반탁운동과 미 ·소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이를 계기로 우익민족진영은 다시 민족통일총본부를 창설하여 독립쟁취의 기틀을 잡으려 하였다. 1947년 1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44대 1로 반탁을 결의하고, 1월 24일 경교장()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1947년 6월 1일에는 이승만() ·김구가 반탁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미 ·소 공동위원회에 통고하였다. 이리하여 1947년 6월 23일 단오절을 계기로 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된 반탁운동은 8월 말 미 ·소 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될 때까지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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