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배려하며 더불어 함께할 줄 아는 어린이
자신을 사랑하며 존중하는 어린이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어린이
2모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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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건희 | 등록일 | 19.05.23 | 조회수 | 17 |
조 · 중 연합군은 몇 차례의 내부적인 갈등을 겪은 후 3차 공세(1950.12.31 ~ 1951.1.8)를 개시하여 38선을 돌파하였다. 사령관 팽덕회는 주력 부대를 의정부-서울 축선으로 향하게 하고 보조 부대를 춘천-원주 축선으로 향하게 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결국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선까지 철수를 결정하였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병참선 신장을 유도하고 우세한 화력으로 중공군 전력을 약화시키며 반격작전을 준비하였고, 중공군의 공세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파악하고 1951년 1월 25일 일제히 반격작전에 나섰다. 1 · 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아군은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하였으나,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중공군의 몇 차례 공세를 계기로 한국 국민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가 스스로 들고 일어나 힘을 보태려고 했으며, 정부는 100만 청년을 무장시켜 중공군을 격퇴시키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단계 (국가기록원 - 6.25 전쟁,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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