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소위 시내 한복판을 비켜 수원백씨 효자정려각이 있다. 백규방과 백진석 부자, 백행랑과 백응만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내린 정려로, 오늘날에는 이 효자정려각보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효자문이라는 식당을 오가다가 한번쯤 살펴보게 되는 것이 예사가 되어버렸다.
네 명의 효자 가운데 완산지에 기술된 백응만(白應晩)은 정려가 내린 효자 행량(行良)의 아들이다. 태어나서 10달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5살에 이미 지각이 있어 그의 아버지를 부르며 찾았으므로, 어머니가 몸소 그를 이끌고 묘소에 가서 그의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켜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간 곳을 알 수가 없어서 온 집안이 놀라 소동이 일어났는데, 다음날 새벽에 산 아래 사는 사람이 그를 등에 업고 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물녘에 이 아이가 묘 곁에서 소리 내어 슬피 울고 있어서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자의 집에 또 효자가 났다 하였다. 그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몸시 슬퍼하여 몸이 여윌 정도로 상례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장례를 치르던 날에는 흙을 파고 토굴을 만들어 거기서 살았으니, 바로 그의 아버지가 묘를 지키던 옛 터였다.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부짖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누가 감탄하지 아니 하겠는가?
분묘가 높은 산봉우리에 있었는데, 그의 선고(先考)가 여묘살이를 할 때에 우물물이 솟아 나왔고, 그가 여막(廬幕)을 철거한 뒤에는 물이 그대로 말라버렸었는데, 응만이 여묘살이를 하자 물이 또 다시 솟아나왔으니, 그 하늘의 감응과 신의 음덕이 어떻게 이와 같이 모아 합쳐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시묘천(侍墓泉) 또는 시묘동(侍墓洞)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전라감영과 전주부에 포상해줄 것을 청원하고, 여러 차례 임금의 수례가 지나는 길에서 임금에게 청원하는 글을 올렸으며, 전라감영에서 조사한 결과를 임금에게 아뢰어, 고종 신미년(1871)에 정려의 명이 내렸다.
출처 _
전주시, 전주문화원, 『완역 완산지』,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