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1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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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정

이름 김도영 등록일 21.05.13 조회수 15

삼천과 추천, 전주천이 합수되어 다시 거듭 소양천과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이 시작 되는 곳을 한내(한천교 아래)라 한다. 한내란 큰내라는 뜻으로 호남으로 빠지는 관로의 요충이었다. 또한 한내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한 마지막 길목이었고,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한 월천이기도 하다.

이렇듯 민족의 애환이 서린 한내 언덕바지에 자리한 비비정 은 그 아름다운 유래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인상 깊었던 정자였는 데, 완산지의 「飛飛亭 在北 三十萬曆癸주武人崔永吉建, 爲別야, 中間撤去, 英祖壬申年, 觀察使 徐公命九重建, 以爲官정」 기록으로 보아 府北 30리에 있던 곳으로 보인다.

비비정은 1573년(선조6년)에 무인 최영길이 별장으로 지은 것인데 중간에 철거된 것을 1752년(영조 28년)에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하여 관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소실되자 최영길의 9대손 최광용 이 을유년에 감영에 품계를 했지만 중건을 보지 못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비비정기」를 보면 우암이 최씨 집안을 찬양하기 위하여 「장비」나 「악비」등 중국 명장의 이름을 붙여 비비정이라고 했을 뿐 지명을 취한 것은 아니다. 「비비정기」는 최영길의 손자인 최양의 청탁을 받고 쓴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최양이 찾아와서 나에게 정자의 기문을 청탁한다. 그의 조부 최영길이 창주첨사를 지냈는 데 정자는 1573년(선주 6년) 창건했다는 것으로 그의 부친 최완성도 나난만호를 지냈으며 최양 또한 조업을 이어 무관이었다. 당시 무관들은 추세 속으로 권문에 아첨하여 뇌물이나 바치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청고한 인물이어서 정자를 일으키어 풍아하게 살았고, 최양은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데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하겠다.

비비정이라 이름한 뜻을 물으니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라고는 하나 내가(송시열) 생각하기에는 그대의 가문이 무변일진대 옛날에 장익덕은 신의와 용맹스러운 사람이었고, 악무목은 충과 효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둘이 다 함께 이름이 비자였다.

비록 세월은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무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장비와 악비의 충절을 본뜬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다 할지라도 뜻은 큰 것이 아니겠는가 한편 예로부터 이곳은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비비낙안>이라 하였고 완산8경중의 하나이다. 

 

비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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