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2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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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소중 너도 소중
  • 선생님 : 최현석
  • 학생수 : 남 10명 / 여 12명

신사임당

이름 이서현 등록일 22.12.09 조회수 20
첨부파일

심사
출생-사망1504 ~ 1551
본관평산
사임당ㆍ임사재
활동분야미술, 문학
출생지강원도 강릉
주요작품<산수도>, <초충도> 등
시대

조선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임당 [申師任堂]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출생과 성장  


신사임당의 외조부인 이사온은 대사헌·한성부좌윤·형조참판 등을 지낸 최응현()의 딸 강릉 최씨()와 결혼해서 딸 하나만 낳았는데, 그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이다. 외조부 이사온은 결혼한 뒤에 처가로부터 오죽헌()을 물려받아 강릉 북평촌()에 살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인 신명화도 1516년(중종 11) 식년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인 용인 이씨는 신사임당을 낳은 뒤 줄곧 남편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렀기 때문에 신사임당도 외가인 강릉에서 성장했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외조부인 이사온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 학문과 시()·서() 등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녀가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외조부 이사온이 안견()의 그림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신사임당이 7세 때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도()를 그렸는데, 그때 이미 매우 절묘한 솜씨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경전()에 능통하고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자수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임당 [申師任堂]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결혼과 죽음

신사임당은 1522년(중종 17) 태종 때 한성부윤() 등을 지낸 이추()의 증손이자 홍산현감()·판관()을 지낸 이의석()의 손자인 이원수()와 결혼했다. 이원수의 조모는 세종 때 한글 창제에 반대한 인물로 유명한 유학자 최만리()의 딸인 해주 최씨()이다. 이원수의 아버지인 이천()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이천의 사촌들인 이기()와 이행() 형제들은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한 뒤에 한성부윤()과 공조판서() 등의 직위에 올라 있었다. 곧 이원수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이어진 유력 가문이며, 특히 중종 때 이후 융성하던 가문 출신이었다.

이이의 〈선비행장〉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결혼하자 그녀의 아버지인 신명화가 이원수에게 신사임당만큼은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신명화가 죽자 1524년 강릉을 떠나 시댁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강릉으로 가서 살기도 하고, 한때는 강원도 평창에서 살기도 했으나, 1541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수진방(, 지금의 수동동 일대)에서 살았다. 언제나 강릉을 그리워하며 한밤에 눈물을 흘리며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1550년(명종 5) 이원수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 삼청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에 이원수는 이선과 이이 두 아들과 함께 조운()의 일로 평안도로 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병이 난 신사임당은 음력 5월 17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그날 관서 지방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서강(西)에 도착했는데, 신사임당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기 전에 행장에 있던 유기그릇이 모두 빨갛게 변하는 괴이한 일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사임당은 죽은 뒤에 파주 두문리()의 자운산()에 매장되었다. 현재 파주 자운서원()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율곡 이이의 묘역 아래에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합장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임당 [申師任堂]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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