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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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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민재 | 등록일 | 22.12.09 | 조회수 | 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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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마스터 플랜에 의해 탄생한 왕세종은 1397년(태조 6)에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이다. 위로는 14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폐위된 양녕대군과 세종의 세자 책봉 후 불가에 귀의한 효령대군이 있으며, 아래로 성령대군이 있다. 세종은 1418년(태종 18) 6월에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두 달 뒤 태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부왕인 태종이 건강을 염려해 책 읽기를 금할 정도였다. 그에 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해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左傳)》과 《초사(楚辭)》 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했다. 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 번을 읽었다. - 《연려실기술》 권 3, 세종 조 고사본말 남달리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자신의 넓고 깊은 학식을 국가 경영에 직접 도입해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의 시대에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안팎으로 안정된 정국 속에서 한글 창제, 예치주의의 실천, 천문학 및 농업의 발달 등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세종은 군주의 자질을 타고 났지만, 그가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태종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만약 태종이 양녕을 폐위시키지 않았다면 셋째였던 세종에게는 왕위에 오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태종은 세종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남으로써 세종이 빠르게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출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가르쳤다. 왕세자 교육을 따로 받지 않은 세종에게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훈수가 속성 군주 수업이었던 셈이다. 특히 태종은 '모든 악명(惡名)은 내가 지고 간다'라는 일념으로 세종에게 부담이 될 만한 요소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제거했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 등을 제거한 것이 대표적이다. 태종의 이러한 과감한 행동 덕분에 세종은 안정된 왕권을 누리면서 성군(聖君)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정국을 이끌 수 있었다. 세종은 세자에 책봉되기 전인 1408년(태종 8)에 심온의 딸(소헌왕후)과 혼인했다.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는 아버지 심온이 태종에 대한 불충의 죄로 죽임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일각에서는 죄인의 딸이 왕비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며 폐비를 주장했지만 태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종도 부왕의 뜻대로 장인인 심온을 복권시키지 않았지만, 정비인 소헌왕후만은 몹시 아꼈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문종, 둘째 아들이 세조(수양대군)다. 세종은 이 밖에 5명의 후궁을 더 두어, 이들과의 사이에서 10남 2녀를 낳았다. 이처럼 많은 자녀를 둔 것은 부왕인 태종의 뜻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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