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7대 국왕.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 자는 수지(粹之)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진평대군, 몇 년 후에는 함평대군이었으나 바로 며칠 뒤에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져서 10년 이상 진양대군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10]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이렇게 봉호를 3번이나 바꾼 경우는 유일하다.
형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섭정을 맡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한명회로 하여금 살생부를 만들어 처참히 죽이고 왕권을 잡았다. 동복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은 유배를 보냈다가 이듬해 사약을 보내 살해하였고,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11]하였다.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나 왕위가 위태로웠는데 이 일로 조카인 단종을 상왕에서 일개 왕자의 신분인 '노산군'으로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낸 뒤 어린 나이(16~17세)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시해했다. 13년 동안 재위하다가 병으로 차남 해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지 하루만에 승하하였다. 어린 조카인 단종과 안평대군패륜 행각에 비해, 본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잘해줬거나 가까웠던 가족들에게는 의외로 잘해줬던 것 같다. 우선 친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겐 매우 극진히 효(孝)를 다하였다.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수양대군의 개인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다.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세조는 부모로부터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데,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 5남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신빈의 장남 계양군, 4남 익현군은 적극적으로 세조의 일련 행위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 외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신빈의 아들들을 극진히 대해줬다 신빈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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