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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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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원석 | 등록일 | 22.12.09 | 조회수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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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로부터 "김홍도와 더불어 백중(伯仲)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783년부터 1819년까지 37년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하며 녹취재에 응하여 19차례 사과(司果)와 사정(司正)에 임명되었다. 1783년 녹취재에서 속화를 그리게 한 것으로 보아 30세경부터 풍속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30대 중 · 후반부터는 주요한 화사의 중책을 담당하였다. 1790년에는 김홍도 · 이명기와 함께 용주사 불화 조성의 감동(監董)을 맡았으며, 1791년에는 이명기가 주관화사였던 정조의 어진도사에 한종일 · 허감(許?) · 신한평 · 이종현(李宗賢)과 함께 수종화사로 참여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화원 중 김득신을 포함한 4명이 개성김씨 가문과 인척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통혼에 의한 화원 가계의 번성과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43세 되던 1796년에는 이인문 · 장한종 · 이명규(李明奎) 등과 함께 《수원능행도병(水原陵幸圖屛)》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 중 김득신과 최득현(崔得賢)이 가장 후한 상을 받았다는 기록을 통해 김득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김득신은 종삼품(從三品) 초도첨절제사(椒島僉節制使)를 지냈다. 김득신의 회화는 크게 김응환의 영향을 받은 작품과 김홍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 김응환의 영향은 전기 작품과 산수화에서 두드러지고, 후기 작품과 풍속 · 영모화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산수 · 도석인물 · 화조 · 영모 · 어해 · 장식화 등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다. 홍월헌(弘月軒)이라는 호가 적힌 <농촌>과 <놀란 물새>는 초기회화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간략한 산수를 배경으로 각각 시골의 아낙네와 말을 탄 선비를 그렸는데, 소재에서는 김홍도와 유사하나 물기 많은 먹을 사용한 바위표현은 가풍(家風)인 김응환의 영향이다. 이후 김홍도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회화세계를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긍재전신첩(兢齋傳神帖)》은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의 형식으로, 윤두서 · 조영석 · 김홍도가 그렸던 소재를 새롭게 번안하는 한편 새로운 제재와 표현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였다. 예를 들어 <짚신삼기>는 전통적인 산수를 배경으로 한 윤두서와 달리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호박 덩굴이 늘어진 사립문과 논을 배경으로, 짚신을 삼는 농부와 이를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김홍도에 비해 훨씬 더 부드럽고 율동감이 느껴지는 필선에, 웃통을 벗은 인물과 혀를 내밀고 헐떡이는 개는 한여름의 무더위까지 전해준다. 김홍도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대장간>에서도 배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현실감을 부여한 김득신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득신 [金得臣]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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