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국내 상황은 정반대다.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국어 대신 외국어가 난무한다. 국어 정책을 담당하는 장관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 언론들에 등장한 단어들만 봐도 그렇다. '블랙아이스 주의' '싱크홀 원인 조사' '필리버스터 대치' '패스트트랙 재판'…. 이러한 용어들을 접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답답했던 분이 많을 것이다. 한글이 외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쉽게 쓸 수 있어서인지,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어려운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일이 빈번하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공공언어 인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27%만이 '공무원들이 국민의 입장에서 용어를 사용한다'고 느꼈다. 공공기관이나 언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는 달라야 한다. 사적인 대화는 그들끼리 알아들으면 그만이지만, 공공의 언어는 국민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서울역에서 반가운 현수막을 봤다. "도로살얼음, 제발 속도 줄이세요." 블랙아이스 대신 '도로살얼음'이라고 하니 금세 파악이 됐다. 얼마 전부터 우리 부가 국립국어원과 함께 최근 새로 등장한 외국어를 우리말 대체어로 바꿔 제공한 노력이 결실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1코노미'는 '1인 경제', '원포인트 회의'는 '집중 회의',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 등으로 '새 말'을 만들고 있다. 클라우드, 빅데이터, 딥러닝 등과 같은 용어도 처음 들어왔을 때 쉬운 우리말로 먼저 만
들어 보급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 용어들의 뜻을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편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 신문맹(新文盲)을 만들고 기술 혁신을 어렵게 만든다. 4차 산업혁명의 변화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학문 분야의 전문용어들도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 그것이 지식문화 강국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