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거란의 침입과 극복 과정(사회 38~41쪽) 거란은 당이 멸망한 이후 당의 북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웠다. 고려는 거란이 여러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발해까지 멸망시키자 거란을 경계했다. 이후 송이 건국되자 고려는 송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거란을 더욱 경계했다. 그러자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으려고 고려를 침입했다(거란의 1차 침입). 고려가 첫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고, 서경(평양)에 가 있던 고려의 왕과 신하들은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때 서희는 거란과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고려가 거란의 추가 공격을 막아 내자,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고려를 위협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에 서희는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기 원하는 거란의 침입 의도를 파악하고, 적의 진영으로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서희의 담판). 그 결과 고려는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아 한때 개경을 빼앗기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거란의 2차 침입). 그러나 고려는 돌아가는 거란을 끈질기게 공격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 2차 침입 이후 거란은 고려에 군사, 교통 면에서 중요한 곳이던 강동 6주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거란은 2차 침입 이후 고려의 왕이 거란 황제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고려가 지키지 않고 강동 6주를 돌려주려 하지 않자 고려를 다시 침입해 왔다(거란의 3차 침입).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예상해 강감찬에게 물자를 준비시키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의 대비를 하게 했다. 그리하여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음에도 고려는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란은 패배하면서도 계속 개경을 향해 나아갔다. 고려는 개경 부근의 군인과 사람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 성 밖에 식량이나 물자를 남기지 않았다. 이에 거란은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돌아갔다. 강감찬을 비록한 고려군은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쳤다(귀주 대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