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은 1855년에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작은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한편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군수의 잘못된 정치에 항의하는 글을 올렸다가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목숨을 잃자, 어지러운 사회를 바꾸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에 동학에 입교해 고부 지방의 책임자인 접주로 임명되었다.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은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빼앗는 등 학정을 일삼았다.
이에 전봉준은 1894년에 분노한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그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고부 민란(고부 농민 봉기)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리며 탄압했다.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한 뒤 본격적으로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다. 농민군은 금세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전국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그런데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 삼아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그는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다고 여겨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문제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갔다.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드러내 놓고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자, 그는 다시 봉기했다.
봉기는 한반도 중남부는 물론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확대되었고, 농민군은 충청남도 논산에 집결한 뒤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서울로 가는 길목인 충청남도 공주를 공격했지만,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잘 조직된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을 받아 크게 지고 말았다.
전국 곳곳의 농민군들도 관군과 양반 유생들이 조직한 군대에게 패했다. 전봉준은 부하의 밀고로 붙잡혀 1895년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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