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동지를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해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0년 서울의 중부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1922년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곳에서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해,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둥팅 호[洞庭湖] 근처의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여름 도쿄에 잠입해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귀환했다. 9월에는 상하이의 철공장에 들어갔다.이후 동지를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해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는데,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0년 서울의 중부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위기를 넘기고 1922년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이곳에서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해,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둥팅 호[洞庭湖] 근처의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여름 도쿄에 잠입해 수력공사장과 주요건물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25년 신채호 등이 조직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으며 5·30총파업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8년 5월에는 일본상품배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자유혁명자연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군의 시설파괴, 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상하이로 돌아와 이회영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해 상하이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한 후, 3월에 상하이 홍커우[虹口]에 있는 육삼정(六三亭)에서 열린 일본요인과 친일파들의 연회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병으로 죽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베이징으로 귀환했다. 9월에는 상하이의 철공장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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