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6반

서로 사랑하고 예의바른 어린이^0^

4학년 6반
  • 선생님 : 장수경
  • 학생수 : 남 11명 / 여 12명

논개

이름 주홍모둠 등록일 19.06.17 조회수 28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이 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논개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에는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논개의 의혼()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을 내려주고 사당()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의기사()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네이버 지식백과] 논개 [論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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