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6반

서로 사랑하고 예의바른 어린이^0^

4학년 6반
  • 선생님 : 장수경
  • 학생수 : 남 11명 / 여 12명

남색모둠자료

이름 남색모둠2 등록일 19.05.20 조회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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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은 나지막한 야산의 바깥쪽에만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팠다. 성안에는 관아 건물만 존재하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서해안을 통해 침략해오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필요한 상태에서 축조되었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왔다. 그리하여 고창읍성은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방어의 전초기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창이라는 지명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불리기 시작하여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고창현"으로 불렸다. 또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고창 지역이 백제 때 모량부리(牟良夫里)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 읍성은 조선 전기의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높이는 약 4m이고, 둘레는 1,684m이며, 면적은 50,172평에 이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방등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남·북의 네 문과 여섯 군데의 치(雉), 두 군데의 수구문(水口門), 옹성(壅城)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창읍성 내에 있는 고창객사에서는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달, 그리고 나라의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 객사 왼쪽과 오른쪽의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고창읍성에 답성놀이와 관련하여 얽힌 사연이 있는데, 음력 윤달을 맞이하여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 위를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성천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윤달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재현하고 있는데, 윤달 중에서도 3월 윤달이 특히 좋고 성 위를 돌 때도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은 저승의 극락문이 열린다 하여 답성 대열의 규모가 가장 크다. 고창읍성의 정확한 축조기록은 없고, 성벽의 ‘계유소축송지민(癸酉所築宋芝玟)’이라는 각명(刻銘)과 고창읍성에 대한 기록을 담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1486년(성종 17)에 나왔다는 점에서 1453년(단종 1)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 등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하였다. 2009년 현재 14동의 관아 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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