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다 꽃이야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익산 역사적 인물 문용기 이규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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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동진 | 등록일 | 20.06.16 | 조회수 | 31 |
문용기:근대독립운동가. 호는 관재(寬齋), 본관은 남평(南平), 오산면 출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취규(聚奎)의 아들. 군산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이리 지방에는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상의하고 사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고 이날 이미 일제가 헌병과 보병부대 병력을 강화하여 대비하고 있어서 양측의 필사적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자,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 군중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시 일본의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했으나 시위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 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이날 거사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의 거룩한 독립정신은 4월 5일 이후 군내 각지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비는 익산시 주현동 115번지 곧 그의 순국 현장에 1949년 4월 29일 이리시민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그의 비문을 썼다. 이규홍:이규홍 [李圭弘, 1881~1928] 독립운동가. 고산·진안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상하이, 만주로 건너가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경찰에게서 받은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대통령표창,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문용기 사진 이규홍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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