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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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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의 고장 함라면(咸羅面) 함열리(咸悅里)

① 함열현관아지(터)(咸悅縣官衙址)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옛 관청자리로 함열현(함라,함열,성당,웅포,황등)의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함열현은 호남지역 금강의 서쪽에 위치하여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함열현은 백제시대 감물아현이었고 1896년에는 전라북도 함열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함열군은 역사속에 자취를 감추게된다

③ 함라노소(咸羅老所)

함라면 함열리에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노소는 지역사회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노인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하였지만 함열리 지역사회를 통솔하고 이끌어가는 정치적 사회적 기능이 강한 곳이었다. 300여년 넘은 역사를 가지며 향약이나 동약과 같이 지역사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④ 삼부자집

④-1이배원가옥(李培源家屋)
함라면 함열리 411-2. 익산시 향토유적제10호. 본교 초대 설립시 재무를 담당한 이배원이 1917년 지은 것으로 3부자집중 가장 먼저 지은 집이다. 조해영가(1918년)와 김안균가(1922년)의 모델로 작용하였다. 건립당시 안채,사랑채,행랑채,문간채,곳간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있다.

④-2김안균가옥(金晏均家屋)

함라면 함열리 475. 지방민속자료 제23호. 전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옥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조선말기의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창고, 광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④-3조해영가옥(趙海英家屋)

함라면 함열리 473. 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 사랑채, 부속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조형영가는 임천조씨로 조선 중기 함라지역에 정착해 일분을 이뤄 임천조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임천조씨 보다는 ‘함라조씨’로 지역사회에서는 더 통용된다.
⑤ 김육불망비(金堉不忘碑)

함라면 함열리 조해영가옥 초입에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1659년(효종10)에 세워진 익산시 향토유적제11호. 이 비석은 대동법 실시로 유명한 영의정 김육(1580~1658)에 대한 선정비이자 불망비이다. 김육은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하였는데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⑥ 서벽정지(터)(棲碧亭址)

서벽정은 1920년대 만석거부 이배원의 아들 하당 이집천(1900~1959)이 함라산 자락에 만든 선정 별장이다. 건물 배치가 자연적 경관과 잘 어울려져 건물 3채와 정자인 육모정이 잘 어울려져 당시 전국에서 손꼽는 별장으로 평가 받았다. 현재는 ‘서벽정’이라 씌여진 비석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⑦ 정려각(旌閭閣)

김안균 가옥 옆에 있는 정려각은 김안균의 4대 조부인 김기형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에 고종때 하사받은 정려를 세워놓은 것이다. 김기형은 그의 부의 병에 상분하였으며 부의 사후에 여묘를 극진히하여 솔과 잣을 심어 산소를 정성껏 가꾸었다고 한다.
⑧ 행동 은행나무(杏洞 銀杏나무)

함라면 함열리 행동마을에 있는 은행나무로 행동의 행(杏)자는 은행나무에서 비롯된 마을명이다. 특히 이 은행나무는 5-6월인데도 가지 한 곳이 노란색을 띠고 있어 함라산의 금맥때문이라는 속설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함라산에서 금이 출토되어 속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유서깊은 은행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