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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 조개무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을 것이다 .
고려시대에 쓰여진 [ 고려도경 ] 에 보면 중국 사신이 고군산군도에 도착하니 김부식 ([ 삼국사기 ] 저자 ) 이 사신을 영접했다는 글이 나온다 . 또한 이 기록에는 고군산군도에 송산행궁이라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건물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
이를 볼 때 고군산군도가 외국과의 무역과 외교의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렇듯 해상 교통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군산군도에는 거친 파도를 피하며 순풍을 기다릴 수 있는 천혜의 진도포구 ( 현 훼리호 선착장 ) 가 있었기 때문이다 .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군산군도의 주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조선왕조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태조 6 년 (1397 년 ) 에 고군산군도에 수군 만호영이라는 수군기지를 설치했다 .
그러나 왜구가 조선의 수군이 있는 고군산군도를 우회하여 금강 하구지역을 노략질하므로 세종 때 고군산군도에 있던 수군기지를 진포변 ( 현 군산시 ) 으로 옮기게 된다 . 이때부터 고군산군도는 고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
또한 선조 2 년 (1569 년 ) 에는 망주봉 기슭에 김영아문이라는 수군기지를 설치하고 수군절제사를 파견하여 임피 , 옥구 , 만경 , 김제 , 부안 , 고창 , 무장 , 영광 등 8 개 현의 해상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이때 만들어진 초기의 수군기지는 현재의 망주봉 남쪽 기슭에 있는 오룡묘 인근으로 추정된다 .
이후 임진왜란으로 일시 폐쇄되었던 수군기지는 1600 년 현재의 고군산군도 중심인 진리마을 우체국 뒷산 기슭에 다시 지어졌다 . 이때 만들어진 수군기지인 고군산진은 상당히 급한 경사면의 사방 80m 공간에 10 채 ( 동헌 , 책당 , 객사 , 만고 , 작고 , 군고 , 장고 , 창고 , 삼문 두 곳 ) 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
중심 건물인 동헌은 가장 위쪽에 자리하여 망주봉을 바라보고 있다 .
-자료 출처 : 군산시청, 군산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