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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3 정현서 한중록
작성자 *** 등록일 21.07.16 조회수 163

얼마전 영화 ‘사도’를 보던중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가 영조를 보러 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 했음에도 옷을 입혀 보내는 장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왕의 말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남편의 상태가 안좋아 보이는게 눈에 띄게 보이지 않나? 근데 왜 저러는거지?’사도세자 보다 자신의 가문을더 중요시하게 여기는 혜경궁 홍씨의 모습에 약간 화가 나기도 했지만,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이렇게 가문을 중요시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 본 사도세자와 영조의 모습은 또 어떠하얐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한중록을 찾아 읽어보고,한국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우선 한중록의 내용을 인터넷에서 간단하게 알아보았는데 총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첫번째편은 비교적 한가할때 쓴 어릴때의 이야기와 이후 궁궐에 들어와 50년 동안 지낸 이야기를 다루고, 나머지 3편은 모두 아들인 정조가 승하한 직후부터 정조의 둘째 아들인 순조에게 잘보이기 위해 정치적으로 썼고,하나 같이 피와 눈물로 절절한 기록이라는 사실이 나왔다. 처음 찾아보기 전에는 첫번째 편을 중점적으로 볼려 했지만, 설명글을 읽다보니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길래 혜경궁 홍씨가 정조의 둘째 아들인 순조에게 쩔쩔맬수 밖에 없었을까?’라는 궁금증이 계속 들었다. 한중록의 첫 번째편의 첫머리는 자신의 가족들 소개로 시작된다. 조금만 읽어 보아도 홍씨 일가가 대명문가 집안이었지만 가족들이 사치를 부리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는데,참..요즘 시대에 본받을 만한 정신이라고 생각이 들었다.이후에 세자빈 간택을 보게 되는데,돈이 없어 옷을 잘 입지 못한것을 보고 오히려 좋아하는 영조와 정성황후를 보고 뭔가 아이러니 하다 생각이 들었고,오히려 첫번째 간택에 붙자 오히려 근심스러워 하면서 딸이 궁궐에서 힘들까봐 고민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기도 했다.이후 궁궐에 들어와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갈등이 심해지는걸 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를 죽인것이 어쩔수 없었다는 선택으로 쓰여졌다. 사도세자가 죽고난뒤 아이러니한 점은 풍산홍씨가 더더욱 번성한다는 점이다. 홍봉한은 좌의정과 영의정을,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호조참판-도승지-이조판서-우의정을 지내며 승승장구합니다.뿐만 아닙니다. 홍봉한의 맏아들인 홍낙인은 승지-이조참판-대사헌-도승지, 둘째 아들 홍낙신과 홍낙임은 승지, 홍봉한의 사촌인 홍송한은 공조판서-형조판서, 조카인 홍낙성은 형조판서-이조판서, 조카 홍낙명은 이조참의-대사간-대사헌을 지냈습니다.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 집안이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만큼 사도세자 사후 영조가 이들 집안에 의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그렇다면 왜 혜경궁 홍씨와 노론이 사도세자를 등지게 된걸까요? 사실 사도세자는 노론 입장에서 이상적 후계자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소개했지만 노론은 영조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영조의 의리, 정조의 의리, 그리고 박근혜의 의리’) 경종이 왕이었을 때 연잉군(영조)을 차기 계승자인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도 맡기라고 요청했다가 당시 여당인 소론의 공격을 받고 주요 지도부가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핵심부로 갈수록 지연·학연보다는 혈연에 더 끈끈한 연대감이 생성되기 마련입니다. 사도세자는 자신들이 추대한 왕의 친아들이었고, 처가는 노론 집안이니 금상첨화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도세자가 어렸을 때는 노론 측 인사들이 세자를 칭찬하는 발언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사도세자를 통해 노론 집권의 뿌리가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양측이 반목하게 된 것은 영조 25년의 대리청정부터입니다. 연유가 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영조 25년은 이른바 ‘토역 정국(討逆政局)’이라고 불리던 시기였습니다. 영조는 노론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반대했던 소론도 온건파 일부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습니다. 이에 노론 측은 시간이 갈수록 경종을 지지했던 '역적(소론)'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세자가 정치 전면에 나선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학계 일각에선 영조가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하려고 세자에게 떠넘겼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혈기왕성한 사도세자는 노론 측이 내민 ‘복수혈전’ 요구를 일축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특권을 인정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소론의 몇몇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 노론을 격분하게 합니다. 부홍파의 리더이자 노론의 실력자인 홍봉한과 그의 집안은 왜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방관했을까요. 

사실 홍봉한은 "전하(영조)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사도세자)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등 한때는 사위를 보호하기 위해 나름 애를 썼습니다.하지만 이런 노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점차 커지는 사도세자의 돌발 행동도 한 몫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몇 달 전에도 큰 '사고'를 쳤습니다. 아버지 몰래 평양에 다녀왔는데 넉 달 후 이를 알게 된 영조는 노발대발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영조가 사도세자의 평양행을 두고 반역을 준비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합니다.)사도세자는 이때 혜경궁 홍씨에게 “이번엔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하니… 나는 폐하고 세손(정조)은 효장세자의 양자를 삼으면 어찌할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미 당시 분위기가 사도세자가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이미 영조의 마음이 떠난 사위(사도세자)를 지키며 반대파(공홍파)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보다는 외손자(정조)를 보호해 가문의 위상을 지키는 '플랜 B'로 방향을 설정했던 것 같습니다.  

임오화변이 발생하고 3개월 가량 지난 후 사위를 떠나보낸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성상의 이번의 거조(사도세자의 처분)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그날의 교시(敎示)도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애통해하는 마음은 애통해하는 것이고, 의리는 의리이니 사사로운 애통으로 인하여 공적인 의리를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영조실록』 38년 8월 26일) 그런 점에서 혜경궁 홍씨가『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그의 '광기(狂氣)' 때문이라고 한사코 강조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궁중엔 '죄인지자 불가승통(罪人之子 不可承統·죄인의 아들은 왕위 계승이 불가하다)'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을 겨냥한 정치적 모략선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그저 '미치광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국법상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지만, 미치광이의 아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쓸때 순조에게 제대로된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자신의 억울함과 슬픔등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음 하는 바에서 썼을것이다.헌데 어째서인지 사도세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드는건 왜일까? 생각이 들었다.한중록을 읽기전엔 혜경궁 홍씨가 도대체 왜이리 비정한가? 생각도 들었지만 한중록을 읽어보니 죽고싶지만 나라의 안위를 위해 정조를 지킬수 밖에 없었던 혜경궁 홍씨의 절실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그렇지만 내 입장으로썬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입장의 차이가 가장 크게 나타났다는 점을 한중록에서 알 수 있었다.혜경궁 홍씨가 날로 심해지는 남편의 병세에 슬퍼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어렸을때 부터 가족은 물론 영조의 사랑까지 받아온 혜경궁 홍씨가 과연 사도세자의 입장을 이해했을까? 또한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 본 영조의 모습은 어질고,현명한 자신에게 잘해주는 임금이었겠지만,사도세자의 모습에서 본다면? 천하의 악독한 ‘아버지’가 없었을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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