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학이념
+ 남성인의 벼리
+ 모표 / 교표
+ 교훈
- 교훈의 의미
성실(誠實) : 개인의 태도 언행 등이 정성스럽고 참됨, 성실한 생활태도
신의(信義) : 믿음과 의리,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남과 사귈 때 지켜야 할 도리
조화(調和) : 사회와 자연에 대해 대립이나 어긋남이 없이 서로 잘 어울림, 균형이 잘 잡힘. 현대 사회의 생활에서 잘 어울림
+ 교목
+ 교가
+ 교호
(교호의 유래와 의미)
1971년 봄 오종록교감 선생님의 부탁으로 8회졸업생인 송민 교수가 작사하였다. 송 교수는 교호 제작의 원칙으로 패기가 넘치는 거센 자음에 부드러운 자음을 곁들이고 밝은 모음과 중성모음을 적절히 섞어 쓰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야문명을 일으킨 신화적 민족의 후예인 첼탈민족의 언어에서 때려눕히다, 불타다, 뜨겁다, 커다랗다, 강력한 힘, 돌덩이, 높은 산 우드머리 등의 단어에서 앞에 말한 원칙에 맞는 음절들을 음조에 맞도록 배열하여 겉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우리만이 알고 있는 신비로운 주문 같은 힘찬 교호를 제작하였다. 아래 글은 송민교수가 교호 제작과정을 직접 설명한 내용이다.
※ 아 래 ※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우선 몇 가지 원칙을 정해 보았다. 먼저 교호란 여러 사람이 소리를 모아 마음껏 외치는 것이므로 그 음절 하나하나의 발음이 패기(覇氣)에 넘치면서도 멀리까지 똑똑히 들려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성이 우선 ㅊ, ㅋ, ㅌ, ㅎ, 과 같은 거센 자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감이 거칠기만 해서는 발음하거나 듣기에 모두 거북하므로 ㅁ, ㅇ, ㄹ, ㄴ, 과 같은 부드러운 자음을 적절히 곁들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거센 자음과 부드러운 자음을 적절히 결합시키면 결국은 거칠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아 딱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남자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여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히 언어구조에도 음만으로는 아무 것도 성립도지 않는다. 모음이 어울려 주지 않으면 단 한마디의 음절도 성립도지 않는 것이다. 자음에 관한 원칙을 정했으니 다음에는 모음에 관한 원칙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자음에는 거센 소리를 지나치게 쓴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어감의 음색이 어두워 져서는 안 된다. 그 누가 어두운 세상을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밝은 세상을 위해서는 음색 또한 밝아야 한다. 밝은 모음에는 ㅏ, ㅗ, 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모음으로서는 ㅏ, ㅗ, 와 같은 밝은 모음에 중성 모음인 이 정도를 적절히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그 내용이 무의미한 발성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의미가 없는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갑갑한 언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겉으로 의미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잠재하고 있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언어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멕시코에서 지금도 쓰이고 있다는 한 원주민의 언어 첼타(Tzeltal)어에 눈이 머물렀다. 이 언어에 는 pam(쓰러뜨린다. 때러 눕히다) cik(불타다) katim(뜨겁게 하다) muk(커다랗다) ip(강력한 힘) tom(돌맹이) wic(높은 산, 언덕) hol(우두머리)와 같은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첼탈 민족은 고대에 마야 문명을 일으킨 신화적 민족의 후예이기도 하다. 무서운 저력을 과시한 민족인 것이다. 이 언어의 어감이 어쩐지 정열적이고 힘 있는 곳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야만 취급을 받을지라도 언젠가는 그 저력이 되살아날 것임에 분명하다.
그 힘에 넘치는 단어에 마침 앞에서 정해둔 원칙에 맞는 음절이 많이 보였다.
pa(파), ka(카), ci(치), ton(톤), hol(홀), mu(무), i(이), 등등, 이 음절들은 바로 ㅊ, ㅋ, ㅌ, ㅍ, ㅎ, 과 같은 거센 자음에 ㅏ, ㅗ, l, 와 같은 밝은 모음, 그리고 ㅁ, ㄹ, ㄴ, 과 같은 부드러운 자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음절로 이루어지는 단어들이 남자다운 기백을 뜻하는 것들이다. 이 음절들을 이용하면 앞에서 정해놓은 원칙을 살려가며 겉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우리만이 알고 있는 힘찬 야성만을 암시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제는 이 음절들을 음조에 맞도록 적절히 배열하면 된다.
다 만들어진 날이 1971년 6월 14일이었다. 서너 달 걸린 셈이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힘을 다했다. 물론 첼탈어를 1948년경 M. C. 슬로콤이람 미국학자가 연구해 준 덕택이었지만, 완성하고 나서 오종록 선생님께 곧 취지를 적어 올렸다. 또 하나의 우리말 교호에 응원가를 끼워, 그리고 그 해 7월의 무덥던 날 직접 전교생 앞에서 그 뜻을 풀어 준 후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지나 그 뜻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동창인 정봉화 선생께서 몇 번 그 뜻을 풀어 기록에 남기자는 부탁이 있었다. 늦게나마 그 부탁에 응하게 되니 시원하다.
※ 아 래 ※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우선 몇 가지 원칙을 정해 보았다. 먼저 교호란 여러 사람이 소리를 모아 마음껏 외치는 것이므로 그 음절 하나하나의 발음이 패기(覇氣)에 넘치면서도 멀리까지 똑똑히 들려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성이 우선 ㅊ, ㅋ, ㅌ, ㅎ, 과 같은 거센 자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감이 거칠기만 해서는 발음하거나 듣기에 모두 거북하므로 ㅁ, ㅇ, ㄹ, ㄴ, 과 같은 부드러운 자음을 적절히 곁들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거센 자음과 부드러운 자음을 적절히 결합시키면 결국은 거칠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아 딱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남자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여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히 언어구조에도 음만으로는 아무 것도 성립도지 않는다. 모음이 어울려 주지 않으면 단 한마디의 음절도 성립도지 않는 것이다. 자음에 관한 원칙을 정했으니 다음에는 모음에 관한 원칙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자음에는 거센 소리를 지나치게 쓴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어감의 음색이 어두워 져서는 안 된다. 그 누가 어두운 세상을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밝은 세상을 위해서는 음색 또한 밝아야 한다. 밝은 모음에는 ㅏ, ㅗ, 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모음으로서는 ㅏ, ㅗ, 와 같은 밝은 모음에 중성 모음인 이 정도를 적절히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그 내용이 무의미한 발성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의미가 없는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갑갑한 언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겉으로 의미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잠재하고 있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언어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멕시코에서 지금도 쓰이고 있다는 한 원주민의 언어 첼타(Tzeltal)어에 눈이 머물렀다. 이 언어에 는 pam(쓰러뜨린다. 때러 눕히다) cik(불타다) katim(뜨겁게 하다) muk(커다랗다) ip(강력한 힘) tom(돌맹이) wic(높은 산, 언덕) hol(우두머리)와 같은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첼탈 민족은 고대에 마야 문명을 일으킨 신화적 민족의 후예이기도 하다. 무서운 저력을 과시한 민족인 것이다. 이 언어의 어감이 어쩐지 정열적이고 힘 있는 곳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야만 취급을 받을지라도 언젠가는 그 저력이 되살아날 것임에 분명하다.
그 힘에 넘치는 단어에 마침 앞에서 정해둔 원칙에 맞는 음절이 많이 보였다.
pa(파), ka(카), ci(치), ton(톤), hol(홀), mu(무), i(이), 등등, 이 음절들은 바로 ㅊ, ㅋ, ㅌ, ㅍ, ㅎ, 과 같은 거센 자음에 ㅏ, ㅗ, l, 와 같은 밝은 모음, 그리고 ㅁ, ㄹ, ㄴ, 과 같은 부드러운 자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음절로 이루어지는 단어들이 남자다운 기백을 뜻하는 것들이다. 이 음절들을 이용하면 앞에서 정해놓은 원칙을 살려가며 겉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우리만이 알고 있는 힘찬 야성만을 암시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제는 이 음절들을 음조에 맞도록 적절히 배열하면 된다.
파이카치 파이톤
카치무치 호치카
파이카치 파이톤
카치무치 호치카
홀-카치 파이카치 남성 남성
홀-카치 파이카치 남성 남성
다 만들어진 날이 1971년 6월 14일이었다. 서너 달 걸린 셈이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힘을 다했다. 물론 첼탈어를 1948년경 M. C. 슬로콤이람 미국학자가 연구해 준 덕택이었지만, 완성하고 나서 오종록 선생님께 곧 취지를 적어 올렸다. 또 하나의 우리말 교호에 응원가를 끼워, 그리고 그 해 7월의 무덥던 날 직접 전교생 앞에서 그 뜻을 풀어 준 후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지나 그 뜻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동창인 정봉화 선생께서 몇 번 그 뜻을 풀어 기록에 남기자는 부탁이 있었다. 늦게나마 그 부탁에 응하게 되니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