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관순의 아빠는 지금 일본의 침략을 받고 시달리는것은 나라의 힘이 약해서이다. 나라의 힘을 기르려면 서양 문물을 받아드리고 신학문을 배워야한다. 라고 했고 우관순을 서울로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유관순은 방학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사람들이 우리글을 배우는걸 싫어했다. 왜냐하면 우리글에는 민족의 얼이 담겨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무렵, 우리 겨례는 내 나라, 내땅에서 마음 놓고 사는것 조차 힘들었고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태극기를 든 남녀노소가 한 목소리로 독립을 외쳤다.유관순의 마음도 뜨거워졌다.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독립 만세를 불렀다.거리에는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일본 헌병들은 닥치는대로 총을 쏘아대고 칼을 휘둘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만세소리는 그칠줄을 몰랐다. 유관순이 기숙사로 돌아왔을땐 이미 여러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잡혀간 뒤였다. 1919년 3월 10일, 일본은 학교를 강제로 닫았다. 그래서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고 유관순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독립 만세를 부를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그리고 독립 만세를 부를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밤이 되자, 유관순은 횃불을 들었고 다른 산봉우리에서도 횃불이 올랐다. 그리고 아우내 장터에 날이 밝았다. 오후 1시, 사람들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일본 헌병들은 총과 칼을 휘둘렀고 많은사람이 죽었다. 유관순도 일본 아뭐하지 끌려가 재판을 받고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1920년 9월 28일, 나라를 구하려고 죽음 무릅쓰고 독립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19살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유관순이 나라를 사랑했던 마음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 나라의 소중함을 알게 해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