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서로 소통하며 존중하는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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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 등록일 | 19.04.29 | 조회수 | 36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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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혁명을 일으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다 (권혁주)
전봉준이 동학 혁명 에 성공하여 정부에게 요구한 12개 시정 개혁안을 보면, 그가 얼마나 백성을 위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마음도 잘 알 수 있다 (전봉준에 업적)
조선 말기 동학 운동의 지도자. 호는 해몽. 몸이 왜소하여 흔히 녹두라 불렸으며, 뒷날 녹두 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당하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임명된 조병갑이 많은 세금과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을 보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1894년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전주를 점령하는 등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일본군과 연합한 정부군의 반격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전봉준은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에 일생)
개항 이후 계속된 외국 세력의 경제 침탈과 개화 정책 추진으로 조선 정부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어 당시 농촌 사회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통받던 농촌 사회에 동학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온 동학교도들은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과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최제우의 죄를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삼례 집회 후 동학의 지도급 인사들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충청도 보은에서 농민 2만여 명과 함께 동학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외세의 배척과 부패한 관리의 처벌도 주장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동학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농민을 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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