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행복한 우리~~^^
  • 선생님 : 이은식
  • 학생수 : 남 12명 / 여 3명

백정기의사의일생

이름 조에준 등록일 19.05.23 조회수 30
우리 민족은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침략해오는 주변 민족에 대하여 피로써 항쟁하면서 민족 존영의 명맥을 수호해왔다. 그 중에서도 최근세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행위는 그 규모와 성격이 가장 크고 잔혹한 것이었을 뿐더러 마침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강토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살륙하고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독립투쟁도 심각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불행하게도 한 때 그 같이 치욕의 역사를 면치 못했다 할지라도 그 반면 민족의 혼이 죽지 않았고 불굴의 항쟁력으로 민족 전체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기에 민족의 위대함이 있다. 이것이 민족정신의 기반이요, 민족사의 전통이다. 건양(建陽) 원년인 1896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분개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고종(高宗)이 비(妃)인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을 피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임시 옮겨 거처했던 그 시기 이 지역 독립운동가 구파(歐波) 백정기(白貞基)의사가 출생했다. 백정기의사는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살때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해서 정읍이 고향처럼 됐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을 업으로 살아나온 백의사는 편모 슬하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남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똑똑한 소년으로 주위의 촉망을 한몸에 받아왔다고 도 기록에 남아 있다. 강인하였으며 남을 위하는 일을 잘 하였고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으며 남달리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그의 나이 11살때 소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잃는 통한의 아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 무렵 전국을 휩쓸고 유행하고 있던 ‘오적배들이 오조약을 만들어 삼천리 강토를 왜놈들에게 팔아먹고 있다’는 동요를 부르며 그는 이미 이때부터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활발한 성격에 미소년의 용모를 지닌 의사는 13살 되던 해 명문과 부호로서 이 고을 일대에 이름을 떨치던 창녕(昌寧) 조(曺)씨 문중의 규수 팔락여인(1966년 작고)과 혼인하게 된다. 부호인 처가쪽에서 빈한한 가세인 의사를 위해 5백여석이라는 재산을 주었으나 의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이같은 당돌하고도 늠름한 기품에서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인간적 넓은 도량과 소양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이와같은 사내로서의 분별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장래를 말해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특히 이 때부터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하여 이 고을의 부자였던 의사의 처가는 왜놈들의 수탈정책의 과녁이 되었으며 이 광경을 눈으로 본 의사였기에 그후 항일투쟁의 정신적 무장을 공고히 다지는데 큰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주경야독으로 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 다시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도 높아 고향에서 일이 있을 때면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등 비범한 청년 백정기는 점진적으로 항일투쟁의 골격을 키워나갔다. 그는 적진을 뚫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철저히 알아야한다는 병법을 새기며 일본어를 익히는 등 일본을 궤멸하기 위한 단계를 한발 한발 이행해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2월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을 목격한 것이 의사의 행동력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는 급히 고향에 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평화적인 운동을 일제가 무력으로 탄압과 살륙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가 피를 흘려서 독립을 쟁취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애국적 장지를 안고 고향을 등지게 되는데 이때부터가 이른바 의사 백정기의 찬연한 투쟁시절로 접어드는 본격적인 항쟁사를 기록한다.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 파괴에 나선 것. 이을규(건국 초대감찰위원)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등과 함께 경인(京仁)간의 일본인 기관을 습격하려 한 이 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큰 사건이었다. 만주(滿洲) 펑톈(奉天)으로 망명,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던 의사는 이듬해 겨울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가 일시적으로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민함을 발휘, 임기응변으로 광부 행세를 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24년 일본에 밀입국한 의사는 동경에서의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꾀한다. 이때 일본 천황(天皇)의 암살기도에 참여하지만 이 거사 역시 실패에 돌아감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上海)로 재차 망명하게 된다.
이 천황 암살기도에는 몇 가지 후일담이 전해진다. 이 일을 계획할 때 의사의 용모에 매혹된 모리(森)라는 묘령의 일본여인이 모든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했으며 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의사가 체포 직전의 비운에 빠지게 됐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을 빠져나왔다는 일화도 그 중 하나.
상해로 건너간 의사는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게 되며 한때 농민운동에도 투신한다. 특히 이 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일종의 파괴성 국제조직으로서 의사가 이 조직에 가입하게 된 것은 일제 타도의 근본 목적이 그들의 붕괴에 있고 그 붕괴는 철저한 일제의 파괴밖에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결국 수많은 항거를 전부 행동화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의사가 1928년 중국(中國) 남경(南京)에서 열린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 회의에 조선(朝鮮)대표로 참석한 것도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이라는 국제조직을 통해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 침략의 마수를 제거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연장으로서의 참여인 것이다.
1930년부터 상해에서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의 주요인물로 활동 중 1932년 청년연맹 예하의 결사대로 BTP라는 흑색 공포단을 만들어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기관들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한다. 이 무렵 의사가 벌인 거사로는 여순(旅順)에서 일본 수송선 1만5천t급의 폭파를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해외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되리만큼 큰 사건이었고, 다른 여러 곳의 폭탄의거와 함께 일본 관민에 준 위협은 적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 1933년 이강훈(李江勳) 이원훈(李元勳) 등 동지들과 함께 홍까우(虹口)공원에서 주중(駐中) 일본대사 유기찌(有吉明)와 일본 대사관원 그리고 친일 중국인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암살계획에 참여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이 계획의 사전누설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의사는 이 거사를 마지막으로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나가사끼(長崎)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일본의 법정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36년 5월 22일 41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1946년 6월 8·15해방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된 동지 이강훈의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봉환, 서울 효창공원 안에 안정돼 ‘3의사 묘’로 불리운다. 1963년 백의사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실로 짧은 의사의 일생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한 일제의 타도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던 애국적 장지로 일관하였던 일생이기도 하였다. 우리를 빼앗고 우리를 죽이는 적에게는 투쟁을 통한 철저한 응징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의사의 애국정신이었고 독립투쟁의 목표였다. 그래서 의사의 생애에 점철된 항일사(抗日史)는 오직 행동을 통한 투쟁으로 일관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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