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4반

‘8703.23-1010’ ‘0803.10-0000’
위의 숫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연도표시? 계좌번호? 이 번호들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거래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관세사이다. ‘8703.23-1010’은 1,500cc 초과 3,000cc 이하 신차 승용차를 뜻한다. ‘0803.10-0000’은 수많은 과일 중 말리지 않은 신선 바나나를 나타낸다. 수출과 수입을 하는 모든 무역거래 상품에는 고유의 품목분류(HS)코드가 부여되는데 이에 따라 관세율이 달라진다. 국가간 자유무역협정(FTA)이 맺어지면서 관세가 적용되지 않거나 관세율이 바뀌는 등 수출입을 둘러싼 환경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관세사는 이 같은 국가간 무역거래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통관을 하는 물품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세관 검사장 라인을 통과하고 있다. <관세청 제공>

관세사는 수출입 과정에서 통관업무 대행을 맡아 한다. 수출입을 하자면 세관 통과에 필요한 신고서 등 관련 서식 작성과 복잡한 서류 등을 구비해야 한다. 만일 바나나를 수입해오려는 무역업자가 있다면 바나나 원산지가 수입 가능 지역인지부터 따져야 하고 식물검역기관이 발행하는 식물검사 증명서 취득 등 신경 쓰며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업자 입장에서 수출입 관련 법령을 일일이 꾀고 제대로 대처하기도 힘들다. 이 때문에 관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최근 자유무역협정을 맺기로 한 중국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세계 각국과의 FTA가 활발해지고 국가간 무역거래가 복잡해지면서 관세사의 업무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관세 혜택을 받기 위한 정확한 품목분류와 원산지 인증뿐 아니라 무역 전반에 걸친 컨설팅까지 관세사의 역할이 한층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과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관세사의 일터가 될 수 있다. 관세사들은 관세법인에 속하거나 개인 사무실을 꾸리는 것 외에도 다국적 기업이나 무역협회,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진흥공단 등에서 일한다. 관세사들은 무역실무는 물론 외환거래법 등 다양한 지식을 꿰고 있어 법무법인이나 회계법인 등에서도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또 7·9급 관세직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한다. 공무원이나 공기업 등은 입사시험을 칠 때 가산점이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

청솔관세법인 여주호 대표관세사(47)은 관세사가 된 지 16년째다. 처음엔 공무원을 했다. 업무관계 때문에 파견을 나갔다 우연히 관세사라는 직업군을 접하게 됐고, 그길로 관세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그때가 30대 초반이다. 1990년대 말만 해도 관세사 시험 준비는 녹록치 않았다. 과거 관세사는 관세청 출신들의 특별전형이 많았다. 여 관세사가 시험을 준비할 당시에는 관세사 자격증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변변찮은 학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학 때 세무학과를 다녔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가 생각하는 관세사의 매력은 민간의 영역을 띄면서도 공공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해야 하고, 차별화된 마케팅을 통해 영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적극성도 필요하다. 안정적이지만 수동적인 공직과 도전적이지만 리스크가 큰 민간의 특성 중 장점을 두루 갖춘 직종이라는 의미다.

인천본부세관 관세불복 심의위원회에서 관세 심의를 하고 있는 여주호 관세사. <청솔관세법인 제공>

여주호 관세사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면서도 내가 하기에 따라서는 시장개척을 무한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직업”이라며 “이것이 관세사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여 관세사는 세관조사 과정에서 억울하게 몰린 수출입 업체의 권리를 구제해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얼마 전 찾아온 사건의뢰인이 이런 경우다. 의뢰인은 외국에 있는 지인에게 물건을 보내면서 정식 수출신고를 거치지 않고 품명을 개략적으로 기재해 간이신고를 했다가 세관에 적발됐다. 관세법 등 관련 법령상 의뢰인의 행위는 하자가 없는 정당한 행위였다. 하지만 세관에서는 품명을 거짓으로 신고했다며 밀수출 혐의를 적용, 검찰에 기소했다. 졸지에 밀수출범으로 몰린 의뢰인의 심적, 물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 관세사는 “평범한 중소기업의 대표로써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안”이라며 적극적으로 그를 대변했고 결국 무혐의로 종결됐다. 사건의뢰인은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넸고, 여 관세사도 뿌듯함을 느꼈다.

반대로 사람이다 보니 수출입신고를 잘못하게 되면 악몽이다. 수입신고 때 품목분류에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관세 추징, 가산세 납부 등 사후 리스크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세정관세법인 이영모 상무(46)는 관세청에서 24년간 근무하다 지난해 명예퇴직한 후 관세사로 활동하고 있다. 관세직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항상 “현장에 나가 대한민국 최고의 관세 서비스를 해보자는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관세청 공무원 당시 2년간 해외연수를 나가 영어실력을 다졌고,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까지 따낸 ‘열성파 팔방미인’이다. 국내에서 관세사로 활동하면서 공인회계사 자격까지 갖춘 사람은 10명 이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영모 상무는 오랜 기간 관세청에서 근무하며 관세 관련 전반의 업무능력을 갖췄지만 막상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수출입 기업이나 개인 사업자를 상대로 통관대행 일을 따내거나 컨설팅을 맡는 것도 관세사의 능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베테랑 관세사들은 통관업무 대행 보다는 컨설팅에 주력하고 이 일이 부가가치가 높다.

이 상무는 경남 사천에 있는 기계류 수입업체를 5번 연거푸 찾아가 계약을 성사시킨 얘기를 해줬다. 이사 때문에 연차를 낸 업체 담당자의 집에까지 찾아가 기계류 수입관련 설명을 했을 정도다. 한·미 FTA가 맺어지면서 원산지 증명에 따라 관세율이 8%에서 0%까지 달라지다 보니 기업 입장에선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이 오고 갈만큼 관세 컨설팅이 중요하다.

“현재 컨설팅 관리 기업이 500여 곳 정도 됩니다. 매년 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숫자가 달라지긴 하지만, 고객 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죠. 국내는 물론 해외 고객을 찾아가 컨설팅하고 관련 세미나 강연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상무는 “관세사는 회계사와 세무사 성격도 지닌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하듯 관세청도 관세조사를 실시한다. 기업이 세무사의 도움을 받듯, 관세조사에선 관세사의 조력이 필요하다. 무역은 국가간 이뤄지기 때문에 관세와 더불어 외환검사는 물론 밀수입 등 범칙조사 등이 이뤄질 때도 있다.

FTA의 확대로 경영과 밀접한 컨설팅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자재를 수입해 쓰는 건설사의 경우 관세가 있는 국가와 관세가 없거나 관세율이 낮은 국가를 택해 원산지 증명을 하는 방식으로 수입자재비를 대폭 줄일 수 있다. 무역거래선 교체까지도 조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영모 관세사가 미국 현지 고객기업을 방문해 한국과의 무역거래와 관련된 컨설팅을 하고 있다. <세정관세법인 제공>

2014년 국정감사를 앞두고 ‘변리사, 관세사’가 주요 포털의 인기검색어로 떴다. 한 국회의원이 세무당국에서 받은 자료로 밝힌 2013년 전문직 소득 순위에서 3위가 관세사로 연 수입은 2억9600만원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일선 관세사들은 “부풀려진 수치”라며 “사업자 단위별 매출액으로 관세사 1인의 순수입이 아니다”며 반박하고 있다.

관세사의 수입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종사유형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개업관세사(개인사무소, 합동, 법인)는 영업력에 따라 수입 편차가 특히 많이 난다. 전체적으로는 장기 경기불황으로 수수료가 수년간 동결되면서 개업환경이 이전만 못하다.

1~2명의 관세사가 사무실을 꾸려 영업하는 경우도 많다. 세무사들이 기장업무로 사무실 운영비와 기본소득을 올리듯 관세사들은 기본적인 통관대행 일을 바탕에 두고 컨설팅 업무를 한다. 고객유치를 위한 입찰 경쟁 등이 치열해지고 있어 갈수록 소규모 관세사무소 보다는 대형 법인이 유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법인에 속한 관세사의 경우 초임 연봉이 4000만 원 정도이다. 처음 3~4년간 경력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보수가 달라지고 법인의 경우 10년차가 되면 연봉이 1억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여성 특유의 꼼꼼함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 여성 관세사의 인기가 높다.

대부분의 관세사들은 개업을 꿈꾼다. 이영모 관세사는 “보통 관세법인에서 시작한 관세사의 경우 5년 정도 경력을 쌓으면 법인에서 계속 일을 할지, 독립을 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형 관세법인의 경우 수십 명의 관세사를 거느리고 창고사업까지 겸하기도 한다.

관세사의 업무는 법률이 국내법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국제적인 규칙이나 글로벌 경제 동향과 밀접하게 맞물려있다. 때문에 관세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세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시시각각 변하는 제도를 수시로 업데이트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에 둔감하고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어느새 도태될 수 있다. 각 관세법인들이 최근 한국과 FTA를 맺은 국가의 관세법인들과 적극적으로 업무협약을 맺고 활발히 업무교류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관세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이영모 상무는 “어느 직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호기심과 꼼꼼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관세사의 경우 국가간 무역거래품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절대적이라고 강조했다.

여주호 관세사의 경우는 세무학을 전공했다. 세무학은 세금을 다룬다는 점에서 관세사 업무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대학졸업 여부나 학창시절 전공이 관세사 업무를 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관세사라고 하면 무역학, 통상학, 물류학 전공자들을 떠올렸지만 요즘은 경영학은 물론 언어학, 법학 전공자까지 경계가 따로 없다. 최근에는 관세사도 특정 산업분야나 품목별로 특화해 영업력을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서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 공학 전공 출신자가 되레 유리할 수 있다. 실제로 세정관세법인의 관세사 채용에는 영어강사 등 다양한 경력자들이 모였다. 연령대도 20대부터 59세까지 다양했다. 몇몇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따로 은퇴가 없는 것도 큰 장점이다. 현재 80대의 노장 관세사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이영모 관세사는 “다국적 기업이 늘고 무역거래 국가가 다양해지고 있어 영어 등 어학능력을 겸비하면 날개를 다는 것과 같다”고 귀띔했다.

검찰청에서 검사를 상대로 관세법을 설명하고 있는 여주호 관세사, 현재 검찰청 수사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청솔관세법인 제공>

2014년 기준 관세사 국가자격시험에는 3,400여명이 몰렸다. 갈수록 관심도가 높아지고 응시생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반면 최종 합격자는 90명으로 적었다.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는 합격자 수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11년까지는 75명을 뽑다가 2014년부터 합격자를 늘렸다. 합격자 총 90명 중 여성은 30명이었다. 2013년에도 여성은 29명이 합격했다.

응시는 만 20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시험은 관세청이 주관하고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한다. 관세사 시험은 1차 객관식 시험과 2차 논술형시험으로 나뉜다. 1차 시험에 합격하면 그 해, 그리고 다음해까지 2차 시험을 치를 수 있다. 공부할 주요 내용들은 관세법, 관세율 및 상품학, 관세평가와 무역 실무 등이다. 각 과목별로 40점 이상이면서 모든 과목 평균이 60점 이상을 획득하면 관세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

합격자들은 ‘관세사법’에 따라 한국관세사회가 실시하는 ‘관세사 실무수습 기본교육’ 과정을 거치고 관세사 등록까지 마쳐야 진짜 관세사가 된다. 실무수습은 3주간의 기본교육과 5개월의 현장교육으로 이뤄진다. 기본교육 학습평가와 근태평가를 통과한 후 현장교육을 이수하게 되는데 현업 관세사무소에서 현직 관세사의 지도를 받으며 현장 경험을 쌓는다.

관세청 출신 등은 특별전형을 통해서 관세사가 된다. 연간 20여명이 특별전형을 통해 관세사가 된다. 일반전형과 특별전형을 합치면 매년 100명 내외의 관세사가 배출 된다. 2014년 현재 전국 관세사는 1,500명 정도다.

한-중 FTA, 한-뉴질랜드 FTA가 잇달아 타결됐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FTA가 체결되어 관세가 사라지게 되면 관세사의 업무범위가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존재한다. 하지만 FTA 협정은 관세사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많다. 수입물품의 관세가 면제되더라도 수출입신고 등 통관의무는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데다가 FTA와 관련된 제반 행정업무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원산지 규정이 복잡해 이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또 FTA 협정국과 교역이 늘어나면서 수출입신고 건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수확대를 위해 갈수록 각종 관련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그러다 보니 쟁송건수도 많아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일감이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