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소개하ㄱ ㅣ 안중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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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dbtldud | 등록일 | 20.10.22 | 조회수 | 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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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중근(安重根) 그 인물을 알리고 싶은 까닭 : 우리나라를 위해 자기의 몸을 바치신 안중근의사님이 존경스러워서(학교에서 시켜서) 출생 및 사망 : 1879~1910
업적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16]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14]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 어로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유언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사후 :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공동묘역에 묻혔다.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의 소감 : 일제강점기에 대해 다시 돌아본것같고, 안중근의사님이 우리나라을 위해 이정도나 할 수 있다는것에 감동을 받았다. 이 계기로 애국심을 기르고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신분들을 영원히 잊지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출처 : [안중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추신 : 이거 닉넴이 안바꿔져서 여기에 남깁니다. 이 글 작성자는 유시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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