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소개하기(세종 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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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찬영 | 등록일 | 20.10.22 | 조회수 | 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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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4대 왕이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왕.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된 후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이 되는 전반적인 제도를 갖추었고, 조선왕조가 지배 기반으로 삼은 유교문화를 융성하게 했다.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농사에 도움이 되는 천문기구를 개발하고 도량형을 정비했고, 출판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대외적으로 여진과 왜를 정벌하고 명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했다. 세종대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문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을 비롯하여 음악·미술 등 예술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훈민정음의 완성과 반포는 이 시기 문화유산의 결정이라 할 만하다.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간행사업은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 등의 역사서, 〈사서언해〉·〈대학연의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 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 明皇誡鑑〉·〈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동국정운〉 등 훈민정음이나 음운·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 등의 의서, 〈농사직설〉 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중국문학·천문·병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유교의례가 정리되면서 이에 필요한 음악이 크게 발달했다(한국음악). 여러 악기를 조율할 수 있는 율관(律管)이 제작되고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정간악보(井間樂譜)가 만들어지는 등 음악학이 발달했고, 조회아악(朝會雅樂)·제례아악(祭禮雅樂) 등 아악이 정비되었다. 이러한 음악의 발달은 박연(朴堧)이라는 뛰어난 음악가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음악에 조예가 깊은 세종의 역할도 컸다. 1443년 완성되어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와 해설서, 한문서적의 언해서를 간행하고 활자를 목각하는 등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일반 민(民)들에게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보급시켜 유교윤리에 바탕을 둔 교화(敎化)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밖에 춘추관·충주·전주·성주 등에 실록 보관을 위한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세종대에는 과학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천문기상 부문에서는 1434년 천체관측시설인 간의대가 준공되었다. 이곳에 설치된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 등 천문관측기기는 송·원의 과학기술의 영향과 고려 때까지의 우리나라 천문과학의 유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괄목할 만한 것으로 해시계·물시계·측우기의 발명을 들 수 있다. 해시계로는 정초·장영실(蔣英實) 등이 발명한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해시계 ⓒ by Bernat/wikipedia | CC BY-SA 2.0 물시계는 흐린 날이나 밤에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표준시계로 쓰였다. 1398년에 이미 경루(更漏)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가 있었지만, 세종대에는 장영실이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 더욱 발전한 물시계를 만들었다. 1441년 측우기의 발명은 빗물이 땅속에 스며드는 깊이로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개선해 과학적이고 수량적인 강우량 측정을 가능하게 했다. 이밖에도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이라는 역서(曆書)를 편찬하고 발달한 중국·이슬람의 천문학과 역법의 계산방법을 흡수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독자적 역법계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술의 발달이다. 태종 때인 1403년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만들어졌으나 글자의 모양과 크기가 매끈하거나 고르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즉위초부터 새로운 금속활자 인쇄기술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은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활발한 간행사업의 수행은 이러한 인쇄기술의 발전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1431, 1446년에는 도량형 제도가 확립되었다. 아악에 사용되는 황종관(黃鐘管)의 길이와 그 속에 담기는 물의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도량형 제도는 그뒤 〈경국대전〉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화포의 주조기술과 화약 제조기술도 단순한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했다. 천자화포(天字火砲)·지자화포(地字火砲) 등 새로운 화포를 개발했으며, 〈총통등록 銃筒謄錄〉을 편찬하여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정확한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했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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