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1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작고 여린 새싹이에요. 약한 비바람에도 흔들리고 많이 아파할지 몰라요. 하지만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야 키도 훌쩍 커지고 멋진 잎을 자랑하는 튼튼한 나무가 될수 있답니다.

우리의 만남이 예쁜 꽃을 피우고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1년동안 잘 지내봅시다 

서로 돕고 사랑하는 어린이
  • 선생님 : 강영순
  • 학생수 : 남 12명 / 여 13명

이순신

이름 이윤우 등록일 22.11.25 조회수 35

 


1. 개요[편집]

16세기 조선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제독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구국영웅이자, 세종대왕과 더불어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국내를 넘어 전 세계를 살펴보아도 23전 전승이라는 손꼽히는 수준의 전훈을 남긴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다.[14]

심지어 한국인들에게 영웅을 넘어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위인은 오직 이순신 한 명뿐이다.

일본군의 조선 상륙 및 침공 당시 3주 만에 한성,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조선 측 장수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군의 파병 등에 일조하면서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하고 일본을 패배시킨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죽는 순간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은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15]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16]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17]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1545년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나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그 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 되었고, 1579년에는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1580년에 전라도 발포 수군 만호, 1581년에 경차관 서익에 의해[18] 파직되었다가 1582년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고 1583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군관, 함경도 건원보 권관을 지내다가 3년간 부친상을 치르고 1586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에 임명되었으며 1587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했다. 이 해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일부 백성이 납치되고 반격으로 녹둔도 전투를 치르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때 함경북병사 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경비 소홀에 참수형을 청했고[19] 이는 면했으나 다시 파직 및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588년 시전부락 전투에서의 군공으로 복직되었다.

1589년에 전라 감사의 군관이 되었고 정읍 현감에 제수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태인 현감도 겸했다. 그리고 진도 군수, 배포 첨사 임명장을 받고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일찍이 일본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함 건조, 무기와 군비 확충, 군사훈련 등에 힘썼다. 1592년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출병 때는 사천 해전과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한산도 해전에 크게 승리하고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두 달여 뒤에 재출병해서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1593년 웅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삼도 수군 통제사로 선임되었고, 이 시기에 조총을 모방해서 총을 제조해 보기도 했다. 1594년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했고 윤두수가 건의한 수륙 합동작전에 참여해서 영등포, 장문포를 공격했지만 강화 협상 중이라 일본군이 대응하지 않아서 별 성과는 없었다. 1595년에는 우수영과 둔전을 시찰하고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둔전을 통한 곡식을 확보하는 등 생업에 종사했고 1596년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여제를 지냈다. 1597년에 원균에게 인계하고 체포되어 상경한 후 투옥되었고, 선조가 사형을 제의했으나[20] 정탁이 변호하면서 출옥하고 두 번째 백의종군 처분을 받는다. 이후 모친상을 겪었으며 원균이 출전한 칠천량 해전에서 그간 육성해온 군과 자산을 거의 궤멸당했으나 통제사에 재임명된 후 소수 병력으로 출전한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했고, 1598년 조선에서 철군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노량 해전을 치르던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죽음을 함구하고 전투를 지속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가 죽은 뒤에 전투는 승리로 끝났으며 그와 함께 일본-조선-명이 얽힌 지옥과 같았던 전쟁도 끝났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21]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가량을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22]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23]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24]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하였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25]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26]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27][28], 이러한 덕에 40여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 역임 관작[편집]

  • 사후 추증된 관작
    • [29]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30]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31]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시[32] 충무공
      (有明 水軍 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府院君 諡 忠武公)
  • 해석:
    • 명 직위: 수군 도독[논란]
    • 공신호: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34]
    •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35]
    • 조선 직위: 의정부 영의정[36]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37]
    • 군호: 덕풍부원군[38]
    • 시호[39]: 충무공

  • 생전(전사 직전)의 관작
    • [40]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兼 三道水軍統制使)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43]해군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44],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45]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46]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었겠지만,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시절이나 최종 계급을 생각하면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히 틀린 호칭이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나 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47]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48].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49]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거나,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50]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히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남북한을 통틀어 무(武)의 최고봉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고[51][52],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충무공의 호칭을 구별짓는 것이 아닌 이상, 대중이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3. 용모[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용모 문서
 참고하십시오.
external/upload2...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4. 생애[편집]

CC-white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69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4.1. 태어나기 이전[편집]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제요제순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53]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4] 그럴만도 한 것이 조부보다는 연산군의 동궁시절 스승 노릇을 했던 증조부 이거가 나와 점지하는 것이 더 권위가 높음에도 굳이 한 것은 다른 설화가 섞인 것이 아닌가란 추측도 생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55]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56]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나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눈치 없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심지어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과거도 안 치르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역적의 후손이 시험도 없이 음서의 혜택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 음서의 혜택을 받을 정도면 양반 중에서도 명문가이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57]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이들은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고 높임을 받았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조정에서는 대신이요 왕실에서는 인척[58]이 되었음에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가지는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존중받았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59]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시험도 안 보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정에게 조부인 이순신의 증조부 이거는 연산군의 동궁시절 스승 노릇을 했다.

한편 위의 역적 루머와는 별개로, 이백록의 생전 평판은 영 별로였던 듯. 실록을 보면 '무뢰배와 어울려서 말썽을 피우는 일이 많다'라는 비판이 여러 번 나온다.

4.2. 임진왜란 전야까지[편집]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고, 맹인인 친구를 속여서 바로 그 친구네 집 동아를 서리하게 하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악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며 철이 난 후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군수[60]를 지냈던 방진(方辰)[61]의 딸 방수진과 혼인하였고[62],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에 무과 별시(알성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63]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4월 20일[64]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65]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권지란 임시직 또는 실습생의 의미인데, 일종의 간부 기초 교육 과정을 이행한걸로 보인다. 그해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하여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본격적인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66]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36살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무과 병과 급제자는 종9품으로 시작하여 450일을 근속해야 자급이 올라가는데, 이순신의 급제 시기를 감안하면 만호 벼슬을 받기 충분한 품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선조의 결단 덕분이기도 하고, 이순신이 중앙조정에서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진 관사에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제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임으로 온 전라좌수사 이용이 전임자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근무 평점을 타 진포와 비교해 따져서 이순신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고쳐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군기 경차관[67]으로 기어이 이순신과 맞닥뜨린 서익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에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발포 만호 시절 이순신의 상관이던 이용이[68] 함경남병사로 급히 파견되게 되었다. 이때 이용은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여기서 이순신은 여진족의 수괴 중 하나인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인 함경북병사 김우서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보고 없이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려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가 죽었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69]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함경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70] 이후 군관 이운룡,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함경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71]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72]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73]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74]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1】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2】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75]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전글 비밀글 세종대왕
다음글 비밀글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