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완전한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호태왕(好太王)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해는 소수림왕 4년, 곧 374년이었다.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인데, 자타가 공인하듯 초기 고구려를 반석에 올려놓은 왕이다. 소수림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이 왕 3년 곧 386년에 12세의 나이로 광개토대왕은 태자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허우대가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여 준다. 광개토대왕의 사적을 적고 있는 [삼국사기]에는 왕의 활약이 크게 두 방향에서 적혀졌다. 하나는 백제와의 치열한 영토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후연(後燕)과의 분쟁이었다.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10개 성을 쳐서 빼앗았고, 왕 4년까지 매년 백제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의 한강 이남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늘렸다. 한편 왕 9년 이후에는 후연과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 후연의 왕은 모용성(慕容盛)이었는데, 처음에는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나, 고구려는 왕 11년 이후 전세를 가다듬고 착실한 공격 작전을 펴 점차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왕 14년, 모용성을 이어 후연의 왕이 된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성이 함락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끝내 성을 내주지 않고 지켜냈다. 이 일 이후 모용희는 백성의 신임을 잃고 살해되어 후연이 망했으며, 뒤를 이어 모용운(慕容雲)이 북연(北燕)을 세우자 비로소 화친의 관계를 맺었다. 그야말로 고구려의 끈질긴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18년, 곧 408년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나중에 장수왕이 되는 바로 그이이다. 사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시대를 이렇게만 정리해 놓고 보면 다소 심심하다. 대국의 건설자가 겨우 백제와 후연과만 싸우다 일생을 마쳤단 말일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광개토대왕비로 돌아가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 우리 민족 최고의 정복왕 (인물한국사, 고운기, 장선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