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기초, 기본에 충실하면서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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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채이 | 등록일 | 19.05.17 | 조회수 | 11 |
한말 의병투쟁은 1908년 전국적으로 가장 앙양되었고 1909년에 들어와서는 그간 힘차게 활약한 의병장들의 피체 및 희생으로 표면상으로는 1908년에 비하여 저조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의병장들의 신분적인 면이나 저항력에 있어서는 종전과 크게 다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고 특히 호남의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즉 전국 의병투쟁 상에 차지하는 호남의병 비중을 보면 교전회수에 있어서 1908년 전국의 25%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1909년에는 47.3%를 차지하게 되고, 교전 의병수 에 있어서는 1908년 전국의 24.7%였던 것이 1909년에는 60.1%를 차지하여 1909년으로 들어오면서 의병투쟁의 중심이 호남지방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1908년에서 1909년으로 들어오면서 유생의병장들과 아울러 담살이(雇人)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같은 평민의병장이 많이 나타나게 되어 의병투쟁은 점차 대중적 기반을 차지하여 완강성을 띠게 되고, 또 이와 아울러 공간적으로는 종래 준령 산협지대에서 전개돼 오던 의병활동이 평원(平原)지대 · 도시 · 해안의 바다와 도서로 확대되고 또 전술에 있어서도 능숙한 게릴라 전술로 야간기습, 잠복기습 등 대담한 행동을 감행하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갔던 것이다. 또 연해에서는 연해의병들이 일인어선을 습격하여 침략 어로행위와 미곡수송을 차단하였다. 특히 전라남도는 해안 연안과 내륙 가릴 곳 없이 그 활동이 두드러져 1909년 3월 6일 전라남도 관찰사 신응희(申應熙)의 유고(諭告)에, “본도의 폭도는 전국에서 가장 발호하고 횡포를 극하여 …(중략)… 실로 오늘보다 더한 날은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췌(盡瘁)하여 비도의 정찰토벌에 힘써 고심분주하였으나 아직 진정되지 않는 것은 필경 폭도의 정항이 불명하고 지방 인민 중… 이를 동정하여 정황을 감추고 이를 경찰 또는 수비대 헌병대에 보고하지 않는 데 기인한다.“ 라고 한 바와 같이 의병들의 항쟁이 대중에 기반하여 그 성격이 종전과 달라 완강성을 띤 것을 말하여 주고 있고, 또 일제도, “전라남도는 타도에 비하여 적세(의병세력)가 창궐하고 수괴가 각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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