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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에 대한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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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정하은 | 등록일 | 22.12.09 | 조회수 | 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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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조선후기 제22대(재위: 1776~1800) 왕. 개설재위 1776∼1800. 이름은 이산(李?).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조 [正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사서·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의 수입 금지 조처도 이와 같이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國朝寶鑑)』·『대전통편(大典通編)』·『문원보불(文苑??)』·『동문휘고(同文彙考)』·『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간행되도록 하였다(1814).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건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이자,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다고 이해된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했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닌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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