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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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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현우 | 등록일 | 21.11.07 | 조회수 | 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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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은 1906년 7월 29일 서울에서 10만석 지기인 아버지 전영기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2남 4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만큼 전형필의 집안은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자손이 무척 귀했기에 자식이 없던 작은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양부모와 양조부모까지 사는 관계로 양육은 그대로 친부모가 맡았다고 한다. 전형필은 양부모와 친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전형필이 아홉살 되던 무렵부터 안좋은 일이 몇몇 생기기 시작하였다. 집안의 어른들과 양 아버지, 그리고 하나뿐인 형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전형필은 가족들을 잃은 슬픔에 힘든 날들을 보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전형필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을 유난히 많이 좋아했던 전형필은 일요일이면 늘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옛 선비들의 책을 좋아했기에, 그런 책들을 여러가지 수집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전형필의 외삼촌은 전형필에게 옛책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전형필은 우리나라의 책과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전형필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다. 그래서 전형필은 공부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다. 동시에 전형필은 빼앗긴 자신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그 고민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래서 전형필은 방학이 되었을 때 고희동을 찾아갔다. 고희동이 누구냐면, 고등학교 때 전형필에게 우리의 그림을 가르쳐준 선생님이다. 전형필의 고민을 들은 고희동은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는 일을 어떻겠느냐 물었다. 그 말은 전형필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들었으나 전형필은 우리 문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자 고희동은 전형필에게 오세창을 소개해주었다. 오세창은 마음이 곧고, 우리 문화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어른이었다. 더불어, 오세창은 대한 제국의 문신, 정치인, 서화가, 한국 언론인, 독립운동가,계몽 운동자이다. 그렇게 전형필은 자신의 평생의 스승 오세창을 만나며 아버지의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단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오세창은 우리 문화를 지키려면 문화유산을 지켜야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가치있는 그림과 글씨 등을 보는 법을 알려 주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을 스승으로 여기며 따랐고, 오세창 또한 전형필을 제자로 여기며 간송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간송은 산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과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란 뜻이다. 이 호는 전형필이 산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과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와 같이 늘 맑고 깨끗하며 변치 않는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단 오세창의 뜻에서 나온 호이다. 당시 전형필은 엄청난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부자였었기에 전형필은 그 막대한 재산을 우리 문화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는데 사용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얼마 뒤, 전형필은 '한남서림'이라는 서점을 샀다. 그리고 그 서점을 통해서 여러가지 문화재를 모았다. 어느 날, 한남 서림에서 일하던 이순황이 전형필을 급히 찾았다. 귀한 물건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 귀한 물건은 바로 겸재 정선의 화첩인 해약전신첩 이었다. 해약전신첩은 하마터면 불쏘시개로 쓰일 뻔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걸 발견하여 샀는데, 그걸 이순황이 전형필에게 구해다 준 것이다. 전형필은 이렇게 귀한 문화재가 고작 불쏘시개로 쓰일뻔한 것에 상처 받아 더 열심히 우리의 문화재를 모아야겠다고 결심 하였다. 전형필은 어디든 귀한 문화재가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하루는 신윤복의 화첩이 일본에 있단 소식을 듣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엄청나게 큰 돈을 주고 화첩을 사오기도 하였다. 전형필은 이런 화첩이나 책뿐만 아니라 서예, 도자기, 불상, 석탑 등 또한 모았다고 한다. 그만큼 전형필의 재산은 줄고 줄었지만, 전형필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화재의 값이 너무 싸다 생각되면 제대로 된 값으로 사왔다고 한다. 하루는 훈민정음 해례본(훈민정음) 을 누군가가 1000원이란 비교적 헐값에 팔려고 한걸 전형필은 그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만원에 샀기도 했다. 이런 전형필의 마음이 널리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전형필에게 골동품을 팔려고 하였다. 어느 날, 전형필은 한 일본인이 팔려고 내놓은 청자를 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그 청자는 바로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이었다. 전형필은 한눈에 그 청자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바로 다음날, 전형필은 그 일본인을 찾아갔다. 일본인은 이만원을 준다면 청자를 넘겨 준다고 하였다. 일본인은 그렇게 전형필을 얕보며 말했다. 당시 이만원은 좋은 기와집을 20채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전형필은 망설임 없이 돈을 내놓았다. 그렇게 전형필은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을 지켜냈다. 그러나 전형필은 많은 청자가 외국에 팔려갔단 사실에 여전히 안타까워하였다. 그 때, 일본에 살면서 고려청자를 모아온 영국인 개스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려청자 20점을 모두 팔고싶단 소식을 들었다. 전형필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개스비를 만났다. 개스비가 처음 제시한 가격은 한 점당 5000원이었으나 개스비는 전형필의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한 점 당 4000원씩에 팔았다고 알려져있다. 전형필은 그 청자들을 사기 위해 조상님들께 물려받은 땅까지 팔아야 했었으나 전형필은 돈을 잃었단 아쉬움보다 문화재를 지켜냈단 사실에 더욱 더 기뻤다. 그 후에도 전형필은 더 많은 여러가지의 문화재를 지켰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한국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6.25 전쟁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북한군이 쳐들어오자 모두 전쟁을 피해서 더욱 더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전형필은 보화각에 남겨둔 문화재들을 두고 도무지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형필은 보화각의 주변에 숨어 지내며 보화각을 살폈다. 북한국은 보화각의 문화재를 북쪽으로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형필은 마음이 매우 아팠다. 그러던 중 남한군이 북한군을 잠시 쫓아낸 틈을 타서 전형필은 가능한 많은 문화재를 챙겨 부산으로 떠났다. 전형필은 보화각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이 멀쩡하길 바라며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 전형필은 가능한 빨리 보화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보화각에 있던 문화재는 대부분 사라졌거나 망가져있었다. 전형필은 슬펐으나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흩어진 문화재를 찾기 위해서 노력 하였다. 전형필은 망가진 문화재를 고치고 잃어버린 책을 고물상과 책방에서 다시 사 왔다. 그리고 전형필은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일 말고도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에도 힘썼다고 알려져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은 예술가를 돕기도 한 것과 예술 학술지 (학습지 아님)도 만들었다. 학술지가 무엇이냐면, 미술에 대한 전묵적인 글을 싣는 잡지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문화의 가치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활동 또한 하였다. 그러던 중에, 전형필은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렇게 전형필은 끝까지 스승인 오세창이 지어준 호인 간송의 뜻을 따라서 맑고 깨끗하며 늘 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며 1962년 1월 26일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순국 하셨다) 몇년 뒤에, 보화각은 전형필의 호인 간송을 따라서 간송 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 나라의 문화를 지킨 전형필의 노력을 우리는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전형필을 더 존경 할 필요가 있다. 전형필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을 담은 훈민정음이 다른 외국인에게도 팔렸을 수 있고, 다른 문화재들 또한 다른 외국인 손에 넘어갔을 수가 있다. 전형필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우리 나라의 위인들 또한 괜히 위인이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똑같이 존경할 필요가 있고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간단하게 연표로 나타낸 것 (연도표)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남. 1921년 어의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 1930년 문화재 수집 시작. 1932년 한남서림(서점) 인수 1934년 해악전신첩, 신윤필 풍속도 화첩 구입. 1935년 일본인에게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구입. 1937년 개스비에게 고려청자 20점 구입.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 설립. 1940년 보성고보 인수. 1943년 훈민정음 얻음. 1954년 문화재 보존 의원이 됨. 1960년 미술 학습지인 고고미술 만듦 1962년 순국 하심. (돌아가심) 1964년 대한민국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음.
요약 전형필 선택 이유: 다른 분들 비해서 그나마 간단 (대사 비중이 거의 없다.) 업적:우리 나라의 문화재를 보존해주심. 남긴 말(명언):문화재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입니다. 본 받을 점: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문화재 보존에 힘쓴 점을 본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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