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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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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준형 | 등록일 | 21.11.04 | 조회수 | 36 | ||||||||||||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백범 김구와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오른쪽)의 홍커우 의거 전, 백범 김구(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윤봉길은 1932년 4월 상해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 기념식에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피해를 입혔다. 윤봉길의 거사는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특히 중국의 장제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 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 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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