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할거에요.
홍범도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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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서승우 | 등록일 | 22.11.08 | 조회수 | 34 | ||||
홍범도 장군님 출생 (1868년 음력8월27일~1943년 10월25일) 홍범도 장군님의 일생 홍범도는 조선 말기에 의병장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홍범도 장군님을 대표하는 영화는 봉오동 전투이다
생애? 홍범도는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자성, 양덕 등을 전전하였다. 그동안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 11월 갑산에서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만주로로 건너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 부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며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이어서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그는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가족들이 모두 죽고 없었는지라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고, 연해주에 머물렀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에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원동(遠東)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로 참석한다.[1] 1927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 이주당했다. 키질로르다로 옮겨온 그는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후 키질로르다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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