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고 예의바른 어린이^0^
방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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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남색모듬 | 등록일 | 19.06.20 | 조회수 | 27 |
서문교회를 떠나 완산구 효자동의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에 들어서니, 직영하는 어린이집에선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놀며 재잘대고, 사무실에선 동남아시아 출신 새터민들의 고충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선 5년 전부터 ‘방 선생 본받기 운동’ 을 벌이고 있고, 올해부터는 ‘방애인 기념상’ 까지 제정했다. 이명자 사무총장은 “전주 YWCA 초기 활동가인 방애인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말했다. 애인은 황해도 황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개성 호수돈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열여덟 살에 전주 기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전주에 왔다. 당시로선 으스댈만한 신여성이었지만 그는 겸손하고 성실했다. 그는 3년 만에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서문교회 1천여명의 교인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애인은 “전주에 와서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듯 눈물로 아쉬워하니 두렵기 짝이 없다”면서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성심을 다해 봉사할 결심을 했다. 그의 뜻대로 2년 뒤인 31년 9월 기전여학교 교사로서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애인은 2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애인은 황주에서 살던 30년 1월10일치 일기에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들었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라고 했고, 11일엔 “나는 어디로서인지 세 번 손뼉 치는 소리를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라고 했다. 성령 체험후 기쁨에 넘쳐 어렵고 힘든 사람 위해 헌신 고아원 열고 야학봉사 24살때 열병으로 생 마쳐 그렇게 성령을 체험해 겉모습을 꾸밀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이 부유해지고 기쁨에 넘쳤던 것일까. 부잣집 딸과 신여성 처녀로서 단장하던 값진 옷감도, 향수와 크림도 그의 소지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단 한 벌의 옷뿐이었다. 32년 여름엔 수재가 발생해 이재민들이 전주 다가공원에 밀려들었다. 이들은 가을이 돼 찬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자 친인척이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하나둘씩 떠나갔다. 오직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 가족만이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애인은 이를 보고 자신의 필수품인 시계와 만년필을 팔아 셋방을 얻어주었다. 전주엔 그나마 그런 부모조차 없이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인은 그런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짓기 위해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전주 시내 8천여호를 가가호호 방문해 한 푼 두 푼씩 모아 마침내 고아원을 열었다. 방학이 돼도 고향집에 돌아가지 않고 전주 교외 시골에 야학을 열어 글을 깨치지 못한 농촌 여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던 애인은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 들쳐업고 오곤 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깎아주고 검은 때가 덕지덕지 낀 아이를 목욕시켰다. 얇은 옷 단벌로 겨울을 나는 딸이 안타까워 어머니가 보낸 솜옷도 입어보지도 않은채 모두 거리의 걸인들에게 주었다. 애인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길거리에서 무뢰배들이 무섭게 싸울 때 어떤 사람도 그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애인은 두려움 없이 다가가 눈물과 온유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 뭔가에 홀린 듯 싸우던 이들이 웃으며 악수하곤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열병을 얻어 숨을 거두자 전주 시내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배은희 목사는 애인의 전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세상을 비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였다. 그는 스승이 되려는 교만한 성자가 아니요, 형제의 발아래에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였다. 그는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요,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였다.” 전주/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출처] : http://search.daum.net者심빈자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원소농마을 뒷산 중턱을 한참이나 올라가다보면 전주 서문 교회 묘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육신을 묻고 하나님 품에서 안식하고 있는 이름 없는 성자 방 애인 선생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방 애인 선생은 많은 업적을 남긴 분도 아니고, 유명하신 목회자도 아니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결혼도 포기하고 오직 고아들과 정신병자, 문둥병자를 위해 생을 마치신 그분의 짧은 일생이 예수님께서 살다 가신 행적과 너무 닮아 여러분께 그 분을 소개합니다. 그은 1909년 9월 황해도 황주읍에서 방 중일 씨의 장녀로 출생하였고 황주의 양성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의 여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숭의 여학교가 어렵게 되어 다시 개성에 있는 호수돈 여자고등학교로 전학하여 1926년 3월에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하던 그해 4월, 전주 기전여학교의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 전주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전주 기전여고에서 3년을 근무하고 고향땅 황해도 황주에 있는 그의 모교 양성학교에서 다시 2년을 근무하였습니다. 그 뒤 1931년 9월, 다시 전주 기전 여학교에 부임하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2년 동안의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성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단 한 벌의 옷으로 살았고 초라한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할머님이 입으시던 저고리 한 개와 바지에 솜을 넣어 옷을 만들어 보냈는데 그 것 마저 어려운 이웃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본래 그의 아버지 방 중일은 황주에서 세례를 받은 교인 이였는데 타락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첩을 얻어 생활하였습니다.타락한 아버지를 위해 애통하며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그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는데 나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또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하느뇨. 나는 이제부터 아버지가 회개할 때 까지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기도하리라.” 그 뒤 그는 죽을 때 까지 아침을 먹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기도를 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놀림을 받고 방황하던 정신병자 할머니를 모시기도 하였고 문둥병자들의 썩어가는 살을 어루만지며 뜨거운 눈물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도 어찌나 학생들에게 정성스럽게 하는지 선생이라기보다 학생의 어머니라는 애칭이 더 잘 통했다고 합니다. 전주 고아원을 처음 설립할 때 무일푼 인 선생과 친구들(전주 기독여자 청년회)의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1927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앞두고 고아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들이 전주 서문밖 교회의 도움을 얻어 성탄 축하예배의 헌금과 많은 분들의 기도가 고아원의 태동이 되었습니다. 전주 네 곳의 교회로 확장된 청년들의 모임이 1주일간의 기도회를 열었고 각 교회 목사님과 장로들이 모두 기쁘게 동참하여 주었습니다. 그의 일기에 “너무도 기뻐서 밤 10시까지 기도하였다.”는 글이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그들은 세 사람씩 패를 지어 8천호 전주 시내를 가가호호 방문하고 10전, 20전, 1원, 2원의 돈 모으기에 분주하였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기부금 책보를 끼고 시내로 줄달음 쳤다고 합니다. 그의 무기는 기도였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기도를 하지 않고는 절대로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같이 가서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기부를 요청하면 불신자들도 감탄하여 돈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여자의 몸으로 전주 시내 8000호를 모두 심방하였고 결국 기도로 성공하였습니다. 그 바쁜 중에도 그는 전도에도 열성을 보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노방 전도를 하였고 완고한 노인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을 걱정하는 어머니께 쓴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 (전략) 어머님께서 혼자서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이 딸은 잘 아나이다. 어머님도 딸의 뜻을 잘 아시거니와 저는 주님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아주세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소서. .....(중략) 잠깐 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일 외에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저를 원하시와 염려마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깨달으실 줄 압니다. 저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1933년 9월 1일 개학식이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고 9월 16일 그는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주시내에 금방 알려졌고 방 애인 양의 장례식 때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로 향하여 가는 소복 입은 수 십 명의 여자들의 눈물과 울음소리, 수 백 명의 학생들의 울음소리는 가히 전주 시내를 온통 슬픔의 장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전주 서문밖 교회의 배 은희 목사님은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쌓이고 쌓인 일거리를 두고 어떻게 차마 가셨는가, 그대의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던 전주를 그렇게도 쉬이 떠나시었는가, 고아를 업어주던 그대의 등에 짐이 무거워 가셨는가, [출처] ‘조선 성자’ 방애인|작성자 ohyh45 [출처] ‘조선 성자’ 방애인|작성자 ohyh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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