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인류애가 살아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동학들은 1894년 민란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혁명적 농민봉기를 주도한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 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젋은 시절 생업을 위해 약을 팔기도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자 태인 산외리 동곡 마을로 이사하여 세 마지기의 전답을 소유한 소농으로 지내면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겸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외세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1890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한 직후 그는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된다.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주변 교도들의 추천에 힘입은 일이었다. 접주가 된 전봉준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말목장터에서 주로 포교 사업에 전념한다. 1892년 그가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쫒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편지를 썼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곡식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고부군수 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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