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6반

서로 사랑하고 예의바른 어린이^0^

4학년 6반
  • 선생님 : 장수경
  • 학생수 : 남 11명 / 여 12명

김제 금산사

이름 주홍모둠 등록일 19.05.23 조회수 21

화재로 동종(보물) 녹아내렸던 낙산사 사적됐다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규모나 사격(:절의 품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주불(:법당의 중심이 되는 부처)로 모셨고, 금당(:법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유식술기()』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의 중창 이후 후백제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이 1079년(문종 33)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석련대()·오층석탑·노주()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간경(:경전을 읽음)·법석(:법회)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규모가 큰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덕행()·석준()·천정()·응원()·학련()·태전()·운근() 등이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남악()이 화엄대법회를 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주지)으로 취임한 용명()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대장전(殿)·대적광전(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 도생(), 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의 대가 해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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