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6반

서로 사랑하고 예의바른 어린이^0^

4학년 6반
  • 선생님 : 장수경
  • 학생수 : 남 11명 / 여 12명

고창읍성,극락전,금산사,실상사,태조어진

이름 빨강모둠 등록일 19.05.20 조회수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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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은 나지막한 야산의 바깥쪽에만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팠다. 성안에는 관아 건물만 존재하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서해안을 통해 침략해오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필요한 상태에서 축조되었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왔다. 그리하여 고창읍성은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방어의 전초기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창이라는 지명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불리기 시작하여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고창현"으로 불렸다. 또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고창 지역이 백제 때 모량부리(牟良夫里)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 읍성은 조선 전기의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높이는 약 4m이고, 둘레는 1,684m이며, 면적은 50,172평에 이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방등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남·북의 네 문과 여섯 군데의 치(雉), 두 군데의 수구문(水口門), 옹성(壅城)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창읍성 내에 있는 고창객사에서는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달, 그리고 나라의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 객사 왼쪽과 오른쪽의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고창읍성에 답성놀이와 관련하여 얽힌 사연이 있는데, 음력 윤달을 맞이하여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 위를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성천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윤달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재현하고 있는데, 윤달 중에서도 3월 윤달이 특히 좋고 성 위를 돌 때도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은 저승의 극락문이 열린다 하여 답성 대열의 규모가 가장 크다. 고창읍성의 정확한 축조기록은 없고, 성벽의 ‘계유소축송지민(癸酉所築宋芝玟)’이라는 각명(刻銘)과 고창읍성에 대한 기록을 담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1486년(성종 17)에 나왔다는 점에서 1453년(단종 1)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 등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하였다. 2009년 현재 14동의 관아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며, 척화비와 고창읍성 비석군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극락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안국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창건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화가 전해진다. 충렬왕 3년(1277)에 승려 월인이 창건하였다는 ‘월인화상(月印和尙) 창건설’과 조선 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무학대사창건설’이다. 안국사측에서는 이 두 설화를 사실로 받아들여 월인화상이 창건하고, 무학대사가 중창하였다고 보고 있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월인화상 창건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안국사가 나타나는 것은 《적상산 안국사기》로써 광해군 6년(1613)에 안국사를 중수하면서 극락전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47년(1771)에 중창하였으며, 고종 1년(1864) 별겸춘추 이명관(李冕光)의 요청으로 중수되었다. 1937년 극락전과 천물전, 향로전 등에 대규모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1992년 양수발전소 건설로 인해 호국사지 뒤편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바닥면적은 79.89㎡이다. 초석은 방형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동귀틀은 자연의 곡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지붕은 다포계 맞배지붕 형식의 기와지붕이며, 측면에는 방풍판을 두었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나 측면으로 공포가 설치되어 있어 수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다포계 팔작지붕에서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수 차례 보수를 진행하여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정면에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불단을 두어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안국사 극락전은 수 차례 중수 되면서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공포에 사용된 조각 수법이나 비례 등을 통해 건물의 강건함이나 장중함 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보부재가 두 곳이 돌출되어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양식이며, 이 건물을 참고하여 전주사고 실록각을 복원하였다.

 금산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모악산 기슭에 심원암이 있다. 이 암자 뒤쪽으로 나 있는 북쪽 등산로를 따라 1km가량 올라가서 대나무숲을 돌아서면 높이 약 4.5m, 길이 약 5m되는 취령암(鷲嶺庵)터의 자연석 축대가 있으며 여기에서 좌측 산 정상 방향으로 40m 정도 떨어진 곳에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심원암북강 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심원암의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35년(인조 13) 수문대사(守文大師)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현재의 심원암 건물은 6.25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삼층석탑은 도굴꾼들에 의해 여러 군데가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체적인 체감의 비중이 상당히 경쾌하기 때문에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심원암 삼층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다만 『금산사지(金山寺誌)』에 취령암 구지(舊址)에 있는 불전 앞 중정에 세워진 탑으로 1934년 9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삼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4.5m로 이중 기단의 3층석탑이다. 현재 남아 있는 상륜부 부재는 노반석으로 3층 옥개석과 한 부재를 이루고 있다.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으로 이루어진 가구식(架構式) 이중기단이다. 특히 하층기단의 경우 기단저석과 면석 및 갑석이 모두 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은 모두 5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4매였을 가능성이 있다. 탑신부는 1층 탑신석을 제외한 각 층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3층 옥개석은 상륜부 부재라 할 수 있는 노반석과 한 부재이다. 탑신석은 각 층 모두 우주를 흘림기법 없이 다듬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 위, 아래선이 함께 반전하여 처마가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반전되어 있으며 물끊기는 가공되어 있지 않다. 옥개석은 옥신에 비하여 넓은 편이며 추녀 밑이 곡선을 그리며 반곡된 고려시대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과 한 부재로 가공된 노반석은 서쪽 측면이 파손된 상태이다. 훼손된 노반만이 얹혀 있다. 노반석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상부에는 갑석이 가공되어 있다. 상면 중앙에는 원형 찰주 구멍이 얕게 가공되어 있다. 1971년에 기단석이 일부 파손되고 1층 탑신이 도굴되어 우주 3개가 완전 파열되고 흐트러진 것을 해체, 조립하였다. 그 후 1996년 8월부터 11월까지 탑 균열부위의 접착과 손실부위 석재 보충을 위한 보수공사가 실시되었다.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은 고려 시대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석탑이다. 처마에서 느껴지는 반곡의 수법이나 기단형식의 간략화 및 옥개석의 폭이 넓은 모습 등 백제 양식의 단편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백제계 석탑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전체의 형태는 체감율이 적고 옥신에 비하여 옥개석이 둔중하여 안정감이 부족한 점이 흠으로 지적된다.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은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불탑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동시에 건립된 뛰어난 작품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절에는 삼층석탑 외에도 석등·묘탑·탑비·부도·철조여래좌상 등의 뛰어난 유물들이 있다. 이 삼층석탑은 건립 연대와 경위를 잘 알 수 없지만, 불탑이 불상과 더불어 불교의 주된 신앙 대상인 점이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실상사가 창건된 828년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층석탑은 양 탑의 규모와 양식이 비슷한 양탑식 가람의 정형이다. 먼저 동쪽의 삼층석탑의 높이는 8.4m이며, 2중 기단으로 된 3층의 방형 석탑이다. 서쪽의 삼층석탑도 동쪽 탑과 마찬가지로 높이 8.4m의 규모이다. 1,2,3층 각 탑신에는 모두 우주(隅柱) 처리가 되어 있을 뿐 다른 조식은 없으며, 체감율이 커서 안정감을 준다. 옥개석은 각층 모두 4단의 층급 받침이 있고, 전각의 직각으로 된 반전은 상당히 경쾌하다. 탑 상륜부에는 노반이 있고 8엽을 세운 앙화 위에 역시 귀꽃으로 장식된 보개가 얹혀 있다. 이 위에 수연이 있고 높이 솟은 찰간에는 보주(寶珠)가 꽂혀 있다. 동쪽 삼층석탑의 경우, 옥개석 모서리가 약간 파손되기는 하였지만 탑 상륜부까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신라 하대의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2층 기단의 갑석이 동탑에 비하여 경사가 좀 더 완만한 점과 상륜부에 있는 수연이 없어진 점만 다르고 보존 상태는 동탑보다 좀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삼층 석탑은 탑신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 신라 후기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며, 특히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통일 신라 석탑의 원형을 추정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이다. 왕의 초상은 조상 추모의 의미뿐 아니라 왕실의 영구한 존속을 도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특히 태조는 나라를 연 개국시조로서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일국의 시조인 만큼 특별한 예우를 받아서 국초부터 따로 태조진전(太祖眞殿)을 설치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서울의 문소전(文昭殿), 외방의 출생지인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본관인 전주 경기전 등이 그것이다. 조선 태조어진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한 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태조 어진은 신장이 크고 당당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식은 명나라 태조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 어진은 이모본으로서 조선 초기의 초상화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동시에 제작 당시의 화풍도 반영되어 있다. 안면 처리에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목한 부위에 살포시 음영이 깔려 있는 점 등은 이모 당시의 화법을 보여 준다. 옷주름 처리는 곧은 직선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보이지만 선염(渲染) 효과가 선 둘레에 조심스럽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태조어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원본에의 충실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어진은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정면관이 제일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면관은 그려내기가 가장 어렵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참조해 보면, 이 어진은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보(補) 및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엄정한 품위를 잘 표현하였다. 태조 어진은 조선 왕실문화의 격조를 잘 보여주는 초상화이다. 신숙주가 찬술한 『영모록(永慕錄)』을 보면 당시 선원전(璿源殿)이라는 경복궁 내의 열성어진(列聖御眞) 봉안처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이 무려 26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태조어진은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1본뿐이다. 이 어진도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영희전(永禧殿)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하여 화사 박기준(朴基駿), 조중묵(趙重默), 백은배(白殷培) 등이 모사한 이모본이다. 태조 어진의 이모와 관련된 전 과정이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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