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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극락전,금산사,실상사,태조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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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빨강모둠 | 등록일 | 19.05.20 | 조회수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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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은 나지막한 야산의 바깥쪽에만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팠다. 성안에는 관아 건물만 존재하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서해안을 통해 침략해오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필요한 상태에서 축조되었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왔다. 그리하여 고창읍성은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방어의 전초기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창이라는 지명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불리기 시작하여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고창현"으로 불렸다. 또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고창 지역이 백제 때 모량부리(牟良夫里)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 읍성은 조선 전기의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높이는 약 4m이고, 둘레는 1,684m이며, 면적은 50,172평에 이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방등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남·북의 네 문과 여섯 군데의 치(雉), 두 군데의 수구문(水口門), 옹성(壅城)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창읍성 내에 있는 고창객사에서는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달, 그리고 나라의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 객사 왼쪽과 오른쪽의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고창읍성에 답성놀이와 관련하여 얽힌 사연이 있는데, 음력 윤달을 맞이하여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 위를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성천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윤달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재현하고 있는데, 윤달 중에서도 3월 윤달이 특히 좋고 성 위를 돌 때도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은 저승의 극락문이 열린다 하여 답성 대열의 규모가 가장 크다. 고창읍성의 정확한 축조기록은 없고, 성벽의 ‘계유소축송지민(癸酉所築宋芝玟)’이라는 각명(刻銘)과 고창읍성에 대한 기록을 담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1486년(성종 17)에 나왔다는 점에서 1453년(단종 1)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 등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하였다. 2009년 현재 14동의 관아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며, 척화비와 고창읍성 비석군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극락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안국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창건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화가 전해진다. 충렬왕 3년(1277)에 승려 월인이 창건하였다는 ‘월인화상(月印和尙) 창건설’과 조선 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무학대사창건설’이다. 안국사측에서는 이 두 설화를 사실로 받아들여 월인화상이 창건하고, 무학대사가 중창하였다고 보고 있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월인화상 창건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안국사가 나타나는 것은 《적상산 안국사기》로써 광해군 6년(1613)에 안국사를 중수하면서 극락전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47년(1771)에 중창하였으며, 고종 1년(1864) 별겸춘추 이명관(李冕光)의 요청으로 중수되었다. 1937년 극락전과 천물전, 향로전 등에 대규모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1992년 양수발전소 건설로 인해 호국사지 뒤편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바닥면적은 79.89㎡이다. 초석은 방형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동귀틀은 자연의 곡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지붕은 다포계 맞배지붕 형식의 기와지붕이며, 측면에는 방풍판을 두었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나 측면으로 공포가 설치되어 있어 수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다포계 팔작지붕에서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수 차례 보수를 진행하여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정면에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불단을 두어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안국사 극락전은 수 차례 중수 되면서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공포에 사용된 조각 수법이나 비례 등을 통해 건물의 강건함이나 장중함 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보부재가 두 곳이 돌출되어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양식이며, 이 건물을 참고하여 전주사고 실록각을 복원하였다. 금산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모악산 기슭에 심원암이 있다. 이 암자 뒤쪽으로 나 있는 북쪽 등산로를 따라 1km가량 올라가서 대나무숲을 돌아서면 높이 약 4.5m, 길이 약 5m되는 취령암(鷲嶺庵)터의 자연석 축대가 있으며 여기에서 좌측 산 정상 방향으로 40m 정도 떨어진 곳에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심원암북강 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은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불탑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동시에 건립된 뛰어난 작품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이다. 왕의 초상은 조상 추모의 의미뿐 아니라 왕실의 영구한 존속을 도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특히 태조는 나라를 연 개국시조로서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일국의 시조인 만큼 특별한 예우를 받아서 국초부터 따로 태조진전(太祖眞殿)을 설치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서울의 문소전(文昭殿), 외방의 출생지인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본관인 전주 경기전 등이 그것이다. 조선 태조어진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한 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태조 어진은 신장이 크고 당당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식은 명나라 태조의 모습과 흡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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